<말씀과 50> 마태 7좁은 문으로 들어가라(7:13-14)  2010-04-09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산상수훈은 팔복(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팔복은 그러나 사람들이 소원하고 사모하는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목록들로 이루어져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69:29), 애통하는 자(69:29,35:14), 온유한 자(37: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69:3,37), 긍휼히 여기는 자(112:4), 마음이 청결한 자(24:4), 화평케 하는 자(32:16ff, 8:16),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 시편의 거의 모든 곳에서 우리는 팔복을 누리고 있는 당사자들의 기도와 한숨, 탄식과 부르짖음, 그리고 찬송과 감사의 노래를 듣게 된다.

 

도대체 누가 이 길을 복되다 하여 걸어갈 것인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finden, find, discover) 이가 적음이니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아, 그것을 발견하는 자들이 많지 않다.

우리 성경은 잘못하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아서 그 문을 방문하는(찾는) 이가 적다로 읽혀지게 되는데, 그렇지 않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아서, 그것을 발견하는(찾아내는) 이들이 많지 않은 것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발견하는 것은 왜 쉽지 않은가? 그 대답은 팔복이 해준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팔복의 목록을 복 받은 자들의 모습이라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산상수훈 전체를 한 구절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이다. 팔복의 목록들은 온전하신 하나님의 모습이며, 온전하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팔복을 살아내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복된 자들이나, 그 모습을 복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이 생명의 길을 발견하는 자들이 적은 것이다.

 

왜 사람들은 생명의 길을 발견하지 못하고, 넓고 쉬운 길로만 행하는가?

그것은 자기 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제는 이런 저런 선한 일들을 사람들 앞에서 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변화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살인, 간음, 거짓 맹세, 이혼…. 등을 했다 안 했다가 문제가 아니라, 미움, 분냄, 음욕, 자기 변명, 시기, 투기, 악독, 탐욕, 악의, 비방, 교만, 자랑, 무정, 무자비….가 문제이다. 기도, 구제, 자선, 금식 등을 했다 안 했다가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것을 사랑하는 자인가가 문제이다.

 

바리새인들의 의란 언제나 사람들 앞에서의 의이다. 겉으로 무엇을 했다 안 했다, 사람들 앞에 인정 받았다 아니다로 복과 화, 성공과 실패, 의와 불의가 결정되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의다. 그 길은 넓은 길이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의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의 의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 이전에 먼저 마음과 사람됨의 문제이다. 사람들의 인정과 성공을 누리는 것으로 다가 아니라, 나 자신이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 그 사랑을 행하고 있는가의 싸움이다.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논할 수 있을 틈이 없다. 비록 내가 겉으로는 흠과 티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내 마음으론 여전히  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가 나이기 때문이다. 내 안엔 여전히 대들보 기둥 같은 어리석음과 더러운 생각들이 있다. 이 사실을 알고, 인정하며, 시편기자들처럼 탄식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며 살아가는 삶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사람들의 눈 앞에서 살기 때문에 아무도 이것이 진정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길을 발견하지 못한다.

 

마태 6장이 12번이나 이야기하듯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 하나님은 나에게 있어 재판장도 심판자도 아니며, 그렇다고 방관자도 구경꾼도 아니다. 그는 나의 아버지이고, 나는 그의 아들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지 않고 어떻게 아들이라 할 수 있는가? 아버지를 닮는 것은 그분과 같은 성품과 인격과 시각과 마음을 갖는 것이고, 그분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분이 내게 요구하는 것은 능력을 행하거나, 업적을 이루거나, 주를 위해 보란 듯한 어떤 일을 이루어 내는 것‘(7:21-23)이 아니라, 내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을 같이 슬퍼하는 자, 내 아버지가 행동하시는 것과 같이 행동하는 자, 내 아버지가 원수를 사랑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이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내 쓸 것과 내 부족을 아시는 아버지(6:8)께 기도하고 간구하면, 그가 내게 좋은 것, 복된 것을 주실 것이다.(7:7-11) 생명의 길을 이미 찾고, 발견한 자가 되었으니, 그 좁고 협착한 길을 따라 흔들리지 아니하고 걸어가야 할 것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삯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2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