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말씀 : 요한복음서 14장 15절-31절, 15장 18절-27절; 누가복음서 22장 54절 - 23장12절



하나님의 주권, 예수님의 주권은 바로 ‘사랑’입니다. 세상의 주권은 폭력과 억압과 거짓입니다. 어째서 세상의 주권은 그 성격을 바꾸지 않고 끝끝내 존속할 수 있을까요? 어째서 우리네 사회에는 그렇게 많은 고난이 평화의 이름 아래에서 끝끝내 존속할 수 있나요?


그것은 거짓 평화를 앞세우는 사탕발림에 우리가 귀기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주권이 주장하는 거짓 평화가 진짜로 올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평화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짓이 담긴 문제를 제시합니다. 한 무죄한 사람의 죽음이냐, 많은 사람들의 평화냐? 우리는 늘 이러한 거짓된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세상은 무죄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평화를 보류한 적은 없습니다. 무죄한 사람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희생양이라고 하는 말로 대표되듯이 힘없는 사람의 죽음입니다.


힘있는 죄인, 포악한 권력자 한 사람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것은 역사에 너무나 빈번하게 쓰여지고 있는 사실입니다. 힘있는 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힘없는 한 무죄한 사람을 위해서는 결코 수많은 백성들이 죽을 수는 없다고 합니다. 힘없는 한 무죄한 사람은 평화의 이름 아래, 다수의 생존이라는 이름 아래 쉽게 죽임을 당합니다.


힘있는 권력자가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킬 때, 저 놈은 나쁜 놈이다, 나쁜 임금이다, 잘못된 정치다, 저것은 잘못된 주권이다 라고 우리는 항거합니다. 그것이 잘못된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똑같은 권력자가 똑같은 옷을 입고 나와서 “의로운 한 사람이 죽는 게 났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게 낫겠습니까?” 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가차없이 의로운 사람을 죽이라고 손을 들어 버립니다.


그 동일한 인물이 똑같은 일을 저지를 때에, 우리는 단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생길까 봐 그를 죽이라는데 찬성의 표를 찍어 줍니다. 그 의로운 사람은 어차피 가진 권력이 없기 때문에 내가 불이익을 당할 일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죽이고, 악한 권력자를 지지해 줍니다. 이 세상에 있는 통치자들의 주권은 누가 주는 것입니까? 왜 그의 악함은 유지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끊임없이 그를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오호라! 정치가들의 거짓 평화 공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근본적인 죄입니다. 우리도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무죄한 자를 죽이는데 동조하기 때문입니다. 본디오 빌라도 아래 있는 삶은, 거짓 평화라는 현실 속에서 꿈을 꾸고, 우리의 삶은 왜곡됩니다. 우리가 잉태한 죄의 결과로 우리는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고난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고 합니다.


한 쪽에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주권을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그 주권에 있어서 사랑으로 하나됨을 주장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쪽에는, 세상의 아들인 본디오 빌라도가 있습니다. 그는 로마 황제로부터 주권을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처형하는 것은 주권을 가진 로마인 총독만 내릴 수 있는 결정이기 때문에, 십자가 처형은 분명히 본디오 빌라도가 내린 결정입니다. 어째서, 죄가 없다고 인정하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예수를 처형했을까요? 예수를 고발한 사람들이 군중을 선동해서 빌라도 앞에서 시위를 벌입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군중을 만족시켜 주려고 예수의 처형을 결정합니다. 빌라도는 소요가 일어나서 나라가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죄이지만, 그는 죄가 없지만, 이 세상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죄한 사람이라도 죽여야 하겠다’ 이것이 본디오 빌라도의 결정입니다.


평화의 이름 아래 무죄한 자를 죽음으로 내 모는 것이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방식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통치자들의 통치 방식입니다. 나라가 조용하고 평화를 가져온다면 그가 죄가 없더라도 죽여야 한다. 이것이 통치자들의 결정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로부터 이천년이 지났지만 오늘 이 시간까지 통치자들의 통치방식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런 정치 권력이 옳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통해서 빌라도의 통치방식을 고발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그런 정치 권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빌라도의 통치방식이 기만적인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부족한 우리는 마치 그러한 기만적인 결정들 때문에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한쪽에는, 본디오 빌라도, 평화의 이름이라는 정치적 유로, 무죄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력자가 서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똑같은 평화의 이름이라는 정치적 이유로, 무죄한 사람들, 죄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권력자가 서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둘 중에 하나에 여러분의 삶을 맡겨야 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거짓 평화를 깨뜨려 참된 평화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왕의 주권이 영원토록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는 밝은 빛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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