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편

1. 그는 행복한 사람!
      악한사람들의 조언을 따라 행하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경멸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은 자!
2.  오직 여호와의 율법 가운데 그의 기쁨이 있어,
      그의 율법을 밤과 낮으로 묵상하며 사는 사람!
3.  그는 (잘 정비된) 카날 곁에 심겨진 나무처럼
      때를 따라 그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을 것이니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이 다 번성할 것이다.

4. 악인은 그렇지 않다! (참으로 그렇지 않다)
   오직 저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 가운데 서지 못할 것이며,
   의인의 무리 가운데 있지 못할 것이다.

6. 이는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알고 있지만
        악인들의 길은 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전체를 열고 있는 시편 1편은 두 종류의 사람, 두 종류의 인생, 두 종류의 결말을 제시하며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복된 사람/행복한 사람과 악한 사람/하나님이 없는 사람이 대조가 된다.

어떤 사람이 복된 사람인가?

먼저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악한 사람들의 조언이나 꾀를 따라 행하지 않고, 죄인들이 행하는 방식을 따라 살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고 경멸하는 자들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다.

악한자, 죄를 행하는 자, 교만한자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지 않은 사람 – 그는 행복하다. 왜? 악한자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보상을 주셔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사람은 도대체가 악한 사람들의 조언을 따르거나, 죄를 짓거나, 남을 경멸하면서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삶을 살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거기엔 행복이 아닌 다른 것이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악한 자들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살지 않는 것 만으로 사람은 행복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건 최소한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는가? 여호와의 말씀 가운데 그의 기쁨이 있어, 그의 말씀을 밤과 낮으로 묵상하는 자! 그 사람에겐 행복이 따라 다닌다.

사람이 참으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리는 선물도, 성취도 칭찬도 아닌, 여호와의 말씀이다. 그의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다. 악한 자들의 꾀가 아닌 하나님의 삶의 지침(토라)을 따라 살 때 사람은 비로서 행복하다.

그런데 시편기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 때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가르침 속에서 기쁨을 찾으며, 그 말씀을 쉼 없이 묵상할 때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묵상한다는 말(‘하가’)은 비둘기가 ‘구구’거리며 소리를 내듯, 그 말씀을 내내 흥얼거리며 마치 노래하듯 그 말씀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때로 이 말은 ‘신음하는 소리’를 표현할 때도 쓰인다. 어쩌면 이 사람은 말씀으로 인해 밤과 낮으로 ‘신음’하기도 한다. 말씀 앞에서 신음해 보았는가? 말씀은 그의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며, 또한 ‘괴로움과 신음’의 근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신음’은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신음이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잘 정비된 카날 곁에 심겨진 나무’에 비유한다. 이 나무가 심겨진 곳은 우기 때에만 물이 넉넉한 그런 시냇가가 아니다. 이 나무는 사철 내내 물이 넉넉히 공급되는 잘 정비된 카날 곁에 심겨졌다. 때문에 이 나무는 때를 따라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

악인이 사는 삶의 방식을 따라 살지 않고,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속에서 기쁨과 삶의 길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는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이 번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인생을 그렇게 지으셨다. 당신의 뜻을 따라 사는 자들이 행복을 누리며 번성하도록~

하지만 악인은 그렇지 않다. 칠십인역은 한번 더 강조한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이들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바람에 날리는 겨!

의인들은 든든하고, 흔들림이 없으며, 그 삶이 꽉 채워져 있지만
악인들은 가볍다!!! 무게가 없다. 중심도 없다.
그는 어떤 진리나 원칙을 따라 삶을 살아 본 적이 없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았고, 남을 위해 산 적이 없으며
일생을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어떤 가치 있는 원칙도 없다.
그는 타작하여 곡식을 고를 때,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리는 겨와 같다.

그의 인생은 예측 가능하지 않으며, 언제 어떤 일들이 그에게 벌어질지 모른다.
어디로 날아갈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심판 가운데 일어서지 못할 것이며, 의인들의 무리 가운데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의인과 악인, 행복한자와 불행한자 –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의인의 길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지만, 악인의 길은 결국 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악인은 당장 번성하는 듯 보여도, 결국 망할 것이다.
그는 행복을 누릴 내적인 가치를 그 자신 안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의인은 여호와의 말씀 속에서 자신의 행복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주위의 어떤 상황이 그의 행복을 빼앗을 수 없다.
하지만 악인의 행복은 그 중심 내용이 없다. 자기 안에도, 어떤 가치에도 없다.
혹 그가 느낄 수 있는 기쁨이란,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여 얻는 기쁨이거나, 다른 사람을 경멸하여 얻는 기쁨일 뿐이다. 자기 안에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 없다. 다 남들 것을 빼앗아 가지거나, 남들을 멸시하여 얻는 기쁨이다. 그런데 시편기자는 선언한다. 악인의 길은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그의 삶엔 행복이란 없다.

의인은 어떻게 행복 할 수 있는가? 여호와께서 그를 알며, 그의 길을 알며, 그의 삶의 모든 노고와 수고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를 알 뿐만 아니라, 그를 지키며, 그와 함께 하며, 그의 삶을 돌보기 때문이다. ‘안다’(‘야다’)는 말은 함께 산다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그와 신뢰 속에서 함께 살며 그를 깊이 알고, 사랑한다. 그 또한 여호와를 신뢰하며, 그를 알고, 그를 사랑한다. 이 사람은 행복하다. 삶의 매 순간 날마다 새롭게 솟아 오르는 행복을 경험한다.

무엇을 따라 살 것인가? 악인의 길인가, 의인의 길인가!

* 김상엽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7-30 1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