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장 - 나의 선생님, 나의 아빠, 나의 인도자 (마23:1-12)


바리새인의 일반적인 노력들인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율법에 울타리를 치는 것‘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을 행함‘ 보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을 하지 않음‘에 치우치게 된다. ‘~을 행함‘은 상대적으로 종교적인 요구들과 의무들을 지켜내는 것으로 축소되고,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약화 되고 만다.


랍비 문헌에 보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집 안에 있는 물건을 집 밖으로 옮겨야만 할 경우, 먼저 집 안의 물건을 문지방 위에 두고, 문지방에서 집 밖으로 물건을 옮기도록 했다. 그러면 집 안의 물건을 집 밖으로 옮기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의미가 그런 것이겠는가? 거룩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을 만지지 않는 것, ~과 접촉하지 않는 것‘이 되어갔다. 그러나 거룩은 기실 소속의 문제다.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더러운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산다는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2). 그들은 율법의 요구를 어기지 않기 위해 가르쳤다. 실질적인 적용점들을 갖는 가르침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모세 율법이 향하는 방향이 그렇게 소극적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예수님의 바리새인에 대한 비판은 다음의 4가지로 요약된다.
1)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3). 2) 다른 이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우되 자신은 그 짐을 지고자 하지 않는다(4). 3) 그들이 행할 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않고 사람 앞에서 행한다(5). 4) 계명을 행하므로 얻을 수 있는 명예에 더 관심이 많다(6-7).


‘그들의 가르치고 말하는 것은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는 말은 ‘그들이 행하는 방식을 따라서는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의 행함은 잘못된 기초와 동기와 구조와 방향을 갖고 있다.


계명을 지키되 다른 목적으로 지키는 것은 계명에 대한 모독이다. “계명을 지킴으로 공덕을 얻거나, 더 좋은 결과를 얻거나, 상을 받거나,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자 하는 것은 옳은 자세가 아니다“라고 이들 스스로가 가르쳤다. 많은 랍비 문헌 상의 증거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사실상 자신들의 동기의 불순함에 대한 반증일 수 있다. ‘~이 옳다고 말하는 것‘과 그 옳은 것을 나 자신이 행하는 일은 다른 일이다. ‘~이 옳다고 가르치는 것‘과 그 옳은 것을 자기에게 적용하는 일은 다른 일이다. 이 사이에는 괴리가 있다.


무엇이 옳다는 것, 그 옳은 것을 행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안다. 누군가 옳은 것을 행하지 않을 때, 그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엄격하게 대하지 않는다. 그 모든 짐을 지고 살지 않고 적당히 짐을 지고 산다. 자기에겐 다 이유가 있고, 때가 있고, 시기가 있다. 그러니 지킬 수 있는 것은 다 지키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남들에게는 항상 원리 원칙을 적용한다.


바리새인들은 ‘부드러움을 추구하는 자‘들이라 불려졌다. 사실 바리새인들의 울타리치기는 율법조항을 좀더 쉽게 지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보조 장치의 추구였다. 그러나 그로 인해 짐은 결코 가벼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무거워졌다.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안전장치가 아니라 거룩과 경건의 본질인 자비와 긍휼, 의와 인과 신을 따르는 삶이었다(23).


이들은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 술을 길게 했다(5). 이마와 왼 팔에 하나님의 말씀을 써 넣은 작은 상자 같은 것을 매달고 다녔다. 기도할 때는 이것을 꼭 매달도록 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하루 종일 차고 다녔다. 문제는 이걸 차는 행동 자체로 사람에게 그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는 결국 외식을 낳는다.


제일 큰 문제는 그들이 불경건하다는 것이다. 불경건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사람 앞에서 산다는 뜻이다. 모든 행동을, 심지어 종교적인 행동 조차,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 행한다. 사람들의 눈에 경건해 보이고, 있어 보이고, 괜찮아 보이면 그것으로 되는 불경건 속에 있다. 경건을 북돋기 위해 주어진 팁이, 오히려 그것을 행했다는 것 만으로 경건의 모든 의무를 방기하는 쪽으로 사용되고 만다.


계명이 향하는 방향을 향해 살아가지 못하면서, 계명을 알고 있다는 사실, 계명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 계명에 준해서 누군가의 삶을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 - 이것이 사람을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이 모든 말씀의 결론으로 “너희는 랍비라 칭함 받지 말라. 너희는 땅에 있는 자를 너희의 아비라 부르지 말라. 너희는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오직 한 선생, 한 아빠, 한 지도자가 있을 뿐이다.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진정한 스승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고,

진정한 보호자는 한 사람의 인생과 행복을 온전히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이며
진정한 지도자는 스스로 앞서 갈뿐 아니라 뒤쫓는 자들을 자기와 같이 세워가는 사람이다.


사람 중 누가 있어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사람은 자기가 말하는 대로 살지 못하고, 남에게 엄격한 만큼 자기에게 엄격하지 못하며, 뭔가 기특한 일을 한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그를 보고 있기 때문이고, 그를 통해 그가 얻을 명예와 지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은 소망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러니 너희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에겐 한 선생님, 한 아버지(보호자), 한 인도자가 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너희 아빠고, 그리스도 자신이 너희 앞서 가시며 너희를 이끌어 가시는 지도자다.“라는 말씀이다.


양심이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마음의 소리라면, 경건은 하나님이 나의 아빠, 나의 스승, 나의 인도자며 그런 분으로서 그가 지금 우리 곁에 계시다는 영혼의 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