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장 - 바리새인의 누룩 (마16:1-12)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에 대해(1), 예수는 바리새인의 누룩, 곧 그들의 교훈과 가르침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6). 그들의 교훈과 가르침을 조심하라는 말은 그들의 가르침이 다 잘못되었으니, 그 말을 따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바리새인의 행함 또는 삶의 방식을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가르치되 행하지 않고, 행하되 사람에게 보이고자 행한다. 이들은 모세의 말씀을 해석하는 자리에 앉아서 그 말씀을 해석하는데(23:2), 정작 모세는 모른다(요5:46). 그러면서도 모세의 제자라 자칭한다.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는데, 예수가 누군지 모르고, 예수를 믿지 않고, 예수가 행한 대로 행하지 않으면서 ‘예수의 제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리새인과 똑같은 것이다.

그들의 문제의 핵심은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23:2)라는 예수님의 진단에 잘 나타난다. 바리새인의 누룩, 곧 그들의 가르침을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행하긴 행해도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 앞에서 행한다는 것이다(6:1).

어떻게 말만하고 행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것은 약속한 것을 지켰다 안 지켰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말을 했으면 행해야지, 지켜야지!‘ 이런 말과 실천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 또한 문제겠지만, 그것이라면 “연약함“의 문제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문제는 자기가 말하는 것을 자기가 행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자기가 착각한다는 사실 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심각한 착각에 빠져 있는 보다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다.

사람은 스스로 옳다고 하는 기준을 적용하는데 이중적인 양상을 보이면서 당사자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너 그 인간 알아? 그 인간 그거 아주 재수가 없어, 인사를 해도 받지를 않아?“ – “너 그 인간 알아? 야, 그 인간 그거 사람이 아주 재수가 없어, 인사 좀 안 받았다고, 아주 사람을 죽이려고 하더라고!“

서로 자기는 말 한대로 행하고 있는데, 상대는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다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 또한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옳다 하는 바를 행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는 그렇게 살고 있다고 착각을 한다. 가정 사역을 하시는 분들 중에 생각지 않게 이혼하시는 분들이 있다. 알기는 기막히게 아는데, 그 아는 것이 배우자에게는 적용돼도 자기에게는 적용되지 않으니 결국 이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요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2:13)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꾸로 묻자, 본받지 말아야 할 저들의 행함은 무엇인가? “무거운 짐을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23:4) 저들의 모습이다.

바리새인의 교훈의 문제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게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짐을 지고 감당해줘야 한다는 것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제자들 옆에서 그들과 같이 있고, 그들과 같이 산다. 그들을 먹이고, 그들 때문에 속을 끓인다(8-11). 자기 자식처럼, 자기 형제처럼 짐을 져 주신다.

사람은 ‘옳다 그르다‘가 전부가 아니라, ‘사랑하느냐 미워하느냐‘가 근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그 옳은 것을 가지고 누군가를 사랑했느냐 아니면 옳은 것을 가지고 누군가를 미워했느냐‘로 심판하실 것이다. 무거운 짐을 남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으면서 너는 틀렸다 얘기하며 자기 만족에 빠져 살았는지(23:4), 아니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누군가의 짐을 함께 지고 속 끓이며 그를 사랑하며 살았는지 물으실 것이다(갈6:2).

사랑과 미움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행함의 문제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식을 사랑한다. 미움의 감정이 안 들어서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다. 자식이 아니라, 웬수다. 그렇지만 사랑의 행동을 한다. 짐을 져준다. 먹이고 입히고 섬기고 또 섬긴다. 하나님도 그렇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 짐져주는 사랑이 우리의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