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장 - 바다 위를 걷다 (마14:22-33)

믿음이란 예수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다. 배 안에 있다고 안전한 것이 아니며, 바다 위를 걷는다고 불안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배가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배 속에 있더라도, 예수가 없으면 풍랑이 그 배를 흔든다(24). 예수가 배에 타야 비로소 풍랑이 잔잔해진다(32).

우리가 안전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 사람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배 안에 타고 있어도, 제자들은 풍랑에 불안하고 두렵다. 때로 우리는 우리 인생 가운데 예수가 타고 계심에도 불안해 하고 두려워한다. 예수가 잠드신 배에서 풍랑 앞에 '죽을 것 같다' 여기는 제자들 같다(8:25). 우리 스스로 예수를 재워 놓고, 그리고는 불안해 하는 것이다. ...

마태에서 예수는 항상 믿음을 먼저 요구하고 확인한다. 그리고 말한다. “네 믿음 대로 되어라.“ 병자를 고쳐주실 때도, 병자는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항상 그에게 믿음을 요구한다. 믿음이 말하고, 믿음이 사람을 움직여가고, 믿음이 사람의 미래를 열어간다. 침상에 앉아서 가만히 다가오는 백마 탄 기사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신 줄을 놓고, 밥도 굶고 기도만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사람으로 움직여 나가게 한다.

그러한 믿음은 작은 믿음도 있고(31), 큰 믿음도 있다.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큰 믿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의심을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마태에서 믿음은 항상 의심과 함께 간다(31). 믿는 자는 항상 의심의 칼날 위를 걷는다.

의심이란 갈라진 마음이다. 예수와 상황 사이에서 마음이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근심과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고, 실제로 몸 또한 바다에 빠져간다. 죽을 것 같다. 그 때 소리를 지르게 된다. “주여! 구원하소서!“ 그러면 주께서 ‘즉시로‘ 손을 내밀어 우리를 잡아 주신다(31). 그것이 우리를 다시금 믿음으로 살게 한다. 이러한 일들이 삶 가운데 반복된다.

믿음과 의심의 반복은 그가 믿음의 여정을 시작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 배속에 있으면서 배만 붙잡고 있는 자에게는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것은, 그가 예수를 따라 나섰기 때문이다. 예수를 따라 재판정 뜰 안까지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시도했기 때문에 실패가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아무것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도 없는 것이다. 베드로가 물에 빠진 것은, 그가 예수님처럼 바다 위를 걷고자 했기 때문이다. 바다 위를 걷는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바다 위에 발을 내디뎠기 때문에 의심과 두려움이 생기고, 그렇기에 빠져갔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렇기에 구원하고 붙잡으시는 예수님을 또한 체험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의심 한 점 없는 믿음이란 어쩌면 믿음이 아닌 신념일 수 있다. 기독교에서 믿음은 의심과 함께 간다. 깨달음이나 대의 명분을 지키는 것이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불제자가 스승에게 가는 데, 강가에 다다랐다. 아무리 찾아도 사공이 없었다. 그런데 부처에 대한 기쁜 묵상으로 그는 강을 건넜다. 그가 강 한 가운데 이르렀을 때, 그는 파도를 보았다. 그 때 부처에 대한 그의 기쁜 묵상이 약해졌고, 그의 발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부처에 대한 묵상을 일깨웠고, 그는 물 위를 건너갈 수 있었다.

불교에 상당히 비슷한 이야기가 있지만, 여기서의 핵심은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세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의심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욕망과 싸워야 한다. 믿음은 그와 다르다.

믿음은 천지 지으신 하나님이 나와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세상을 지으신 이가 세상보다 크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으로 세상이라는 바다 위를 걸어가는 것이다. 때로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이기 때문이다. 믿음에 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의심은 정죄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 마태는 그들에게서 의심을 배제하지 않는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28:17). 예수께서 자신에게 주어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선포하며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리라는 약속을 주시는 그 때,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눈 앞에 보고도, 제자들 중에 의심하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제자가 아닌가? 아니다. 그들이 제자다.

믿음으로 걸음을 내디뎌야 의심할 일도 생기고, 실패할 일도 생긴다. 그래야 적들의 공격도 거세진다. 인생이라는 바다 위를 배를 타고 건너다보면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람은 위기를 겪고, 그것을 넘어서며 큰다. 신앙은 고통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위기를 믿음으로 건너는 것을 통해 성장하고 커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