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2엘리바스, 하나님과의 화목을 말하다 (22:1-30)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21). 그렇다, 욥 또한 하나님과 화목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욥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겨오던 욥에게 고통과 고난으로 찾아오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


엘리바스 입장에서 화목을 깨뜨린 것은 하나님이 아닌 욥이다. 욥의 죄악이며(5-11) 그의 교만이다(29). 겸손히 하나님을 찾는다면(29) 그는 다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을 것이다(30). 하지만 욥의 입장에서 화목을 깨뜨린 것은 욥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다. 그 이유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면 욥은 어떻게 화목을 되찾을 수 있단 말인가?


엘리바스가 말한다.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3-4) 정확히 반대의 자리에 서서 욥이 말한다.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7:20)


불화를 낳고 있는 것은 욥의 교만과 불경건인가? 아니면 사람을 크게 여겨 그를 마음에 두고 그를 권징하고 시험하며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기대와 자랑인가(7:17-19; cf.2:3)? 엘리바스는 ‘사람이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슨 도움이 된다고 네 의를 주장하는가?’ 묻지만, 욥은 ‘사람이 범죄한들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해가 된다고 하나님이 사람을 붙잡고 놓지 않으시는가?’ 묻는다.


엘리바스에게서 사람은, 의로워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미미한 존재이나, 욥에게서 사람은, 작은 죄조차도 지나칠 수 없을만큼 하나님이 크게 여기시는 존재이다. 의로워도 의미 없는 존재와는 불화할 일도 없지 않겠는가? 불화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기대와 자랑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그러니 화목의 일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겠는가?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23:13-14)."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