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20소발, 자기의 물음에 자기가 답하다 ( 20:1-29)

 

소발이 말한다. “너는 모르느냐(4)? 악인의 이긴다는 자랑은 잠시며, 불경건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임을(5). 그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21). 아무리 가져도 만족함이 없는 그의 번영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20).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릴 것이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날에 그의 모든 재산이 홍수에 쓸려가듯 쓸려갈 것이다(28).“

 

욥은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이야기하는데 친구들은 그의 고통의 호소에 대답하는 대신 엉뚱하게도 신정론 문제를 스스로 제기하고 그에 답을 준다.

 

욥은 지금 하나님이 불의하다며 하나님을 고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욥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결국 자신의 구속자가 되실 것이라며 힘든 오늘을 견뎌간다. 욥에겐 그러나 그 하루가 고통스럽다. 그런데 친구들은 욥의 말을 들어 주는 자리에 있지 않고 욥의 상황을 보고 스스로에게 떠오른 신정론의 문제에 사로잡혀 욥의 말에 답하는 대신 스스로의 물음에 답을 하고 있다.

 

욥은 친구들의 문제 제기와 그에 대한 답을 듣고, 그에 답하며, 자신의 처지를 그들 앞에 꺼내 놓는다. 하지만 그들은 욥에게서 듣고, 욥에게 응답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에게서 듣고, 자기에게 응답한다. 욥의 이야기는 그러니 하늘에 울려 퍼질 뿐이다.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어라.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너희는 내게 위로가 될 것이다.“(21:2).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는다.

 

그들은 욥의 말을 듣는 대신, 욥을 본다. 욥을 보아버린다. 욥의 문제는 이것이라고 판단한다. 문제의 핵심은 신정론이라 파악한다. 그리고 스스로 파악하여 던진 물음에 스스로 대답한다. 그러니 그들은 지금 욥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지고 있는 생각을 꺼내어 다시 확인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욥은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 그들이 제시한 답에 응답하며, 그것으로 다 설명될 수 없는 아니 설명만으로 사라지지 않는 고통의 현실을 호소한다. 욥은 하나님과 대화를 시도한다. 그에게 호소하고 그에게 고통을 아뢴다. 하나님을 만나보기를 원한다. 그가 자신을 들어 주시기를 호소한다.

 

이후 욥은 하나님에게서 듣는다. 그의 호소에 대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욥의 물음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은 욥에게 대답을 주지 않고 무수한 물음들을 던진다. 너는 아느냐? 알거든 내게 답하라. 너는 아느냐? 알거든 내게 말하라.

 

욥의 입을 막으시는 것인가? 아니다. 욥의 물음에 물음으로 답하시는 하나님은 욥에게 필요한 것이 설명나 해답이 아님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대답이나 해명이 아닌 하나님 자신을 욥에게 주신다. 하나님은 욥의 물음에 속 시원한 해답을 주시는 것으로 대답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하나님은 욥을 찾아 그를 만나 주신다. 그의 모든 하소연과 호소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들으셨다고, 그의 호소가 틀리지 않고, 그의 말이 옳다고 말씀하시며 그를 위로하신다.

 

욥과 친구들은 말들이 오고 가나 대화가 아니었지만, 욥과 하나님은 하소연과 물음만을 주고 받았으나 대화가 오고 간다. 하나님에겐 욥이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