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바벨, 흩어짐, (11:1-9)

 

언어의 혼란은 다만 재앙만은 아니다. 언어의 다양성은 세계와 인생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접근을 가능케 한다. 동서양의 차이는 물론 언어만의 차이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다양한 언어는 다양한 존재방식의 필요조건일 것이다.


왜 하나님은 사람들을 흩으셨을까? 사람들의 구호는 우리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였다(4). 무엇이 문제였을까? ‘우리의 이름을 내자는 말은 우리가 우리의 이름을 만들자라는 뜻이다. 사람을 짓고 그 이름을 아담이라 부른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5:2). 그러나 사람들은 대규모 공사를 가능케 하는 정치 체계와 대규모 건축을 가능케 하는 기술의 발전 속에서 스스로 자신들의 이름을 지으려 했다. 대단한 자부심과 자기 신뢰의 표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까지 닿는 성을 쌓겠다던 사람들의 일을 확인하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야 했다(5). 그들의 탑은 하늘까지 닿았던 것이 아니라 그저 땅에 있었을 뿐이다.


사르트르에게서 인간은 본질 이전에 실존한다. '인간은 자유로 저주받았다. 자신이 무엇인지는 자기 스스로 정해야 한다. 자기의 이름을 만드는 이는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의 생물학적 조건뿐 아니라 사회 문화 역사 언어라는 '조건' 속에 주어진다. 시간과 역사와 전통과 언어라는 땅 위의 무수히 많은 벽돌들 위에 놓여진 또 하나의 벽돌 같은 존재가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스스로 자기 이름을 만들겠다고 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흩고, 사람들을 흩어, 온 땅에 흩어지게 한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조건 가운데 살게 한다. 자신들의 한계와 가능성의 조건들을 확인시킨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그에게 약속한다. “내가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너는 복이다”(12:2). 바벨의 흩어짐은 저주가 아닌 복으로 향하는 문의 열림이다. 오순절의 방언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를 말하고 알아듣는 것이 아닌, 각 족속의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하늘까지 닿을 높은 탑을 쌓아야 이름이 생기는 것 아니다. 이름을 지어 주실 하나님, 그의 복 주심을 믿고 길 떠났던 아브람처럼, 나도 떠나 보내진 길을 걸어간다. 내 목소리, 내 언어, 내 삶의 이야기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을 누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