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니 두려워말라 (요6:1-21)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이기보다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다(20). 공관복음에서 예수의 오병이어 기적은 무리들을 향한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에서 비롯된다(막6:34par.). 그에 반해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 기적은 명절을 맞아(4) 예루살렘으로 찾아가는 인파들로 인해 북적이는 길목에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11)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적의 동기가 명시적이지 않다. 다만 이것을 통해 제자들이 시험을 받게 되고(6), 사람들은 예수를 모세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한다(14).

 

표적을 본 자들이 예수를 모세가 예언했던 '나와 같은 한 선지자' 곧 메시야로 인식하기 시작할 때(14),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야일 뿐 아니라 '하나님 그 자신'이심을 보이신다. 풍랑 이는 바다를 노저어가는 제자들에게 바다 위를 걸어 찾아오신 예수님은 '내니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신다(20).  '내니'라는 말은 헬라어 '에고 에이미'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알려주신 이름이 곧 '에고 에이미'이다. 그러니 지금 예수는 바다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서 자신을 모세에게 나타났던 하나님과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존재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단지 모세가 예언했던 '나와 같은 선지자'가 아니라, 모세에게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알리신 '여호와'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분, 곧 하나님 자신이다.

 

모세를 보내어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은 오늘 친히 자기 백성(제자들)에게 찾아가 자신의 이름을 알리신다. 바다를 갈라 자기 백성을 이끌어 내셨던 하나님은 바다를 밟고 자기 백성에게 찾아가 말씀하신다. "내니 두려워 말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유월절 양을 잡으셨던 하나님은 자기 자신 친히 유월절 양이 되어 사람들을 먹이신다. 유월절, 명절을 맞아 하나님을 만나러 예루살렘으로의 길을 떠나온 수 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길목에서 하나님이신 예수가 잔치를 베푸신다. 배부르게 먹이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다 먹이신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기쁨에 들뜬 저들의 웃음 소리에 내 웃음 또한 섞여 있고, 가고자하던 곳에 예수와 함께 도착한 이들의 기쁨엔 내 몫 또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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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 (요 6:22-71)

 

예수에게서 표적을 본 자들이(14) 예수에게 몰려든다(24). 그들에게 예수는 참으로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26) 그러니 예수에 따르면 그들이 예수를 찾아온 이유는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줄 메시야를 바라는 거다. 그들이 만약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표적'을 보았다면 하늘에서 내리는 떡을 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하늘로부터 떡을 준 존재는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었으니 말이다(32).

 

하나님은 생명을 주고 싶으신 거다(35). 하나님은 단 한 사람도 잃고 싶지 않으신 거다(39). 하나님은 자기 전부를 주고 싶으신 거다(56).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백성들은 하늘에서부터 오는 떡을 구할 뿐 하나님 자신을 구하지 않는다. 도스토엡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는 주고 빵은 주시지 않았다고, 자유를 주려면 빵도 주던지, 빵을 주지 않으려거든 자유를 주지 않던지 했어야 했다고,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에게 빵은 주지 않고, 자유만을 주었다고 누군가가 하나님을 고소한다. 젊은 시절 나 또한 그랬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고 싶으신 거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거다(56). 예수에게서 봐야하는 표적, 그것은 떡이 아니라 '사랑'이다. 

 

자유가 없다면 사랑도 없는 법, 나는 빵 보다 '사랑'을 택하련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으니 내가 누구에게 가오리까'(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