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에서 유배기까지 (대상 1:1-3:24)

- 2012년 5월 1일 화요일 묵상

광대한 역사가 펼쳐진다. 수 많은 이름들이 나열되고, 수 많은 족속들 아니 인류 전체가 그 안에 들어와 함께 선다.

갈래 갈래 나눠지는 그 나뉨의 시초엔 그러나 인류의 조상 아담 한 사람이 서 있다(1:1). 그리고 그 위엔 하나님이 계시다.

언뜻 방향없는 나열처럼 보이는 족보엔 분명한 방향이 있다. 어떤?

아담에게서 시작된 족보는 노아, 셈을 거쳐 아브라함에 이르고, 아브라함을 지나 이삭, 이스라엘, 유다, 베레스, 헤스론, 이새 그리고 다윗에 이른다. 그러나 족보는 다윗을 지나 솔로몬을 거쳐 요시야 그리고 여고냐에 이르고, 사로잡혀간 여고냐(3:17)를 넘어 스룹바벨, 그리고 에료에내의 일곱 아들에까지 이어진다(3:24).

언뜻 생각하면 이 족보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구원 받은) 백성의 족보로 여겨진다. 야벳과 함이 아닌 셈이 선택되고,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이, 에서가 아닌 이스라엘이, 그리고 유다가, 헤스론의 아들 갈렙이 아닌 람이, 이새의 나머지 여섯 아들이 아닌 다윗이 선택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역대기의 족보를 기록한 사람의 의도였을까? 만일 그것이 역대기 저자의 의도였다면, 다른 이들의 이름, 그 복잡한 계보, 아들 없이 죽은 이(2:30), 아들 없이 딸만 있던 이(2:34), 애굽 종에게 딸을 준 이의 이야기는(2:35) 왜 기록되어 있는가? 오히려 역대기 기자의 관심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약속의 자손들의 좁은 라인이 아니라, 아담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인류 전체의 얽히고 섥힌 이야기들, 아픔들, 나름의 삶들(에돔의 왕들의 족보), 여인들과 딸들, 나뉘어진 땅들에서 살아 온 수 많은 이들의 삶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창조로 시작된 이야기는 다윗을 거쳐 여고냐를 지나, 유배기의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야기로 향해간다(3:17).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떠나 유배지에 이른 하나님의 백성들은, 약속의 땅 에덴에서 떠나 약속의 땅 바깥에서 살아 온 수 많은 아담의 자손들과 만나 그곳 유배된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유배된 땅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야기.... 그것이 아담에게서 시작된 역대기 족보 1~3장이 보여주는 인류에 대한 그림이다. 이 그림에 관심이 있다면, 유배된 땅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인류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면, 함께 역대기 기자가 보여주는 이야기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유배된 자들의 땅으로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자리까지 우리와 동행하실 것이다. 하루 하루 그분과 함께 역대기 말씀이 열어주시는 세계 속을 걸어가다보면, 유배기를 끝장내신 부활의 주님과 만나게 되리라!

 

cf. 헤스론의 아들 갈렙(2:9의 글루배, 2:19의 갈렙, 2:42의 갈렙은 모두 동일인물로 보인다)은 여분네의 아들 갈렙(4:15)과는 다른 인물이다.

     브살렐 (2:20) - 훌의 자손, 우리의 아들 브살렐은 출 31:2의 성막을 지은 그 브살렐이다.

     2:7의 아갈은 수7:1의 아간과 동일인이다. LXX는 아간으로 옮긴다. '아갈(아카르)은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오케르)'라는 설명에서,

     아카르와 오케르가 서로 상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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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베스와 시므온 자손 (역대상 4장 1절~43절)

2012년 5월 2일 수요일 묵상

역대기는, 약속의 땅 바깥으로 사로잡혀 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이후,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백성의 마땅한 삶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가운데 기록되었다. 시므온 지파가 살던 땅(4:28-31)은 이후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자손이 거주한 지역(느11:25-30)이었으니, 이 지역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많은 이야기가 살아 있는 곳이다.

 

역대기상 4장은 다윗 계열이 아닌 다른 유다 자손들의 이름을 담고 있다. 거기엔 유명한 여분네의 아들 갈렙도 있다. 그러나 본문은 유명한 갈렙이 아닌 야베스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고통가운데 때어나 이름 자체가 '고통'인이 야베스. 지경을 넓혀주시고, 환난을 벗어나 근심없게 해 달라는 그의 기도는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을 다 담고 있다. 약속의 땅 바깥에서 태어나,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이들, 그들의 이름 또한 '야베스(고통)'가 아닌가? 그 이들에게 야베스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은 소망이고, 밤 하늘에 빛나는 별이다.

야베스의 기도는 단순히 어려움을 막아주시고, 부유하게 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약속의 땅에 온전히 거하여 하나님의 약속하신 평강과 안식을 누리며 살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신명기30장의 회복된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복을 구하는 기도이다. 그들의 기도를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면 약속의 땅은 에덴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수고롭게 일 할 수 밖에 없던 저주에서 해방되어 온 세계가 자유와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창5:29; 롬8:19-22).  야베스의 기도는 그러니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는 우리 모두의 기도이다. 죄의 유배된 자리에서 해방되어 의의 땅으로 돌아온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기도이다. 그 기도엔 응답의 약속이 있다.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4:10).

 

시므온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들으셨다'이다. 창48:5-7의 흩어짐의 운명으로 축복아닌 축복을 받았던 레위와 시므온... 역대상 4장에서 시므온은 저주 같은 그 축복을 참된 축복으로 만들고야 만다. 흩어지되, 함의 땅을 정복하고(4:40,41), 아말렉인의 땅을 취한다. 오늘까지 거기에 거주한다(43). 유다만큼 번성하지 못했으나(27), 남은 시므온 족속들은 하나같이 강하고 매우 번성한다(38). 넓고 안정되고 평안한 땅에서 평화로이 살아간다(40). 본래 약속의 땅은 싸워 정복해서 다스리도록 주어진 땅이다. 정복하고 다스리지 못하면 쫓겨나 사로잡혀 가는 땅이다.

 

시므온은 흩어지나 땅을 정복하고 오늘까지 다스린다. 야베스는 고통을 넘어서 참된 안식을 가져다 주는 새로운 질서를 꿈꾼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 모두가 가져야할 두 가지 자세일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기, 주어진 존재와 삶을 온전히 내 것, 아니 주의 것으로 삼아 통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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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혀간 사람들(역대상 5장 1절~26절)

- 2012년 5월 3일 목요일 묵상

4장이 유다와 시므온의 역사를 담고 있다면, 5장은 요단 동편 세 지파의 역사를 담고 있다.

역대기 기자는 이 두 무리 사이의 의도적인 대조를 통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을 건넨다.

4장은 "시므온 자손..이 세일 산으로 가서.... 아말렉 사람을 치고 오늘까지 거기 거주하고 있다"(4:42-43)는 기록으로 끝나고, 

5장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고산 강 가에 옮긴지라. 그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으니라"(26)로 끝난다.

4장의 시므온 자손은 '여호와께서 대대로 싸우리라 맹세하신'(출17:16) 아말렉을 치고, 그 땅을 정복하여, 오늘까지 거기 거주한다.  

이에 반해 요단 동편 세 지파는 앗수르 왕에게 사로잡혀 이방 땅으로 옮겨진 채, 포로들이 귀환한 오늘까지 그 땅에서 거하고 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낳는가?  하나님의 백성 앞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기도하며, 부르짖는 삶이고(20),

다른 하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배반하고, 충성을 나누어,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삶이다(25). 한 때 이들은 전쟁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의 은혜를 구했고,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그들에게 큰 승리를 안겨 주셨다(5:20,21). 르우벤 자손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광야지경까지 그러니 창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땅(창15:18) 그 끝까지를 차지하며 풍요를 누리고 살았다(9). 그러나 이들은 풍요 가운데 길을 잃고, 하나님에 대한 충성의 마음을 나누어 다른 것을 섬기기 시작했다. 욕망을 섬겼다. 변절이다. 욕망이라는 신을 따라 다다른 곳은 포로됨과 사로 잡혀감이었다(5:6,22,26). 정복하고 사로잡던(21) 자들이, 오히려 사로잡혀가게 되었다(22).

내 마음이 나눠지지 않기를!!!  하나님을 향한 충성의 마음을 나누어 다른 곳에 눈짓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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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 자손의 거처와 삶의 방식(역대상 6장 1절~81절)

- 2012년 5월 4일 금요일 묵상

여고냐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갔듯(3:17),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옮기실 때 대제사장 여호사닥도 함께 간다(15).

하지만 대제사장 여호사닥은 사로잡혀 간 것이 아닌, 자기 백성을 따라, 그들과 함께 간다.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은 하나님이 '옮기겼고', 여호사닥은 그것을 따라 그 자신이 저들과 함께 '갔다'. 동사의 주어가 여호사닥이다. 여호와를 섬길 성전이 없는 땅, 이방 땅, 바벨론에서 대제사장 여호사닥은 어떻게 자기 소명을 감당하며 살았을까? 비록 느브갓네살에 의해 파괴 되긴 하였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없는 성전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따라 간다. 그곳에서 그는 흩어진 하나님이 백성과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을까? 대제사장 여호사닥의 아들 여호수아는 이후 포로에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한다(학 1:1). 여호사닥이 자기 백성과 더불어 바벨론으로 갔듯, 그의 아들 여호수아는 자기 백성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제사장이 있어야 할 자리는 '성전'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있어야 할 자리 또한 자신들만의 '지성소'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수 많은 사람들 속일 것이다. 여호와 자신이 예루살렘을 바벨론으로 옮기신 것도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15. 원문엔 '백성'이란 말이 없다).

야곱의 예언처럼(창49:5-7) 레위 자손 또한 온 이스라엘 가운데 흩어져 살아간다(54-81).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 그곳이 레위 사람들의 삶의 자리이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속죄하는 일 -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화목케하는 일(LXX), 이스라엘의 허물과 죄를 덮는 일 - 그 일이 레위 사람들의 소명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삶의 자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 속이고(15),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삶의 소명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화목케 하는 일이며(49),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삶의 방식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는 것이다(31). 그렇게 기록되는  삶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