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기쁨 (누가복음 24장 1절~12절)

2012년 4월 8일 주일 묵상

큰 기쁨은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 어느 정도 결과를 예상할 수 있을 때에도 물론 기쁠 수 있지만, 그 기쁨은 사실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C.S.루이스의 책 제목처럼 <예기치 못한 기쁨>은 때로 우리 인생 전체를 바꾸기도 한다.

성금요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 여인들은 무덤까지 찾아갔다, 돌아와서, 향품과 향유를 준비한다(23:56).

너무도 갑작스런 장례를 치루면서, 더구나 안식일이 다가오기에, 제대로된 장례를 치를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는 토요일(안식일) 하루를 온전히 기다린다(23:56).

다음날(일요일) 새벽 아주 일찍 여인들은 무덤을 찾아간다(1).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돌이 굴려지고, 무덤은 비어 있다(2,3).

놀람, 걱정, 비탄... 두려움(4). 장례도 제대로 치루지 못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34시간을 고된 기다림 속에 보내고(기다림은 마음의 노동이다),

왔건만, 돌은 굴려져 있고, 무덤은 비어 있다. 누가? 도대체 무슨 일이?

그 때 갑자기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녀들 곁에 선다. 엄청난 두려움 속에 그녀들은 바닥에 엎드려진다.

그 때 놀라운 소리가 들린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다."

공포, 걱정, 놀람, 두려움..... 예기치 못했던 천사와의 만남, 예기치 못했던 부활의 소식, '그가 살아나셨다!'

가슴이 방망이질 치고, 온 몸에 전율이 인다.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의 환호성이 터져나온다. 아마도 그녀들은 달려서 제자들에게 갔을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기치 못했던 기쁨으로 밝아도는 날, 부활절, 그녀들의 기쁨이 오늘 나의 기쁨이 되고,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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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의 동행, 평생의 동행 (누가복음 24장 13절~35절)

2012년 4월 9일 월요일 묵상

여인들이 소식을 전한 바로 그 날(13), 여전한 낙심 속에 글로바와 또 한 명의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길을 잡는다.

25리(60스타디온) 그러니 10km가 조금 넘는 길을 가는(13) 그들의 마음은 물음으로 가득하다(14,15). 어른 어른 걸음으로 3~4시간 쯤의 여정...

그 때 한 사람이 그들의 여정에 동행한다. 바로 '예수'다(15)! 누가는 아무 주저함 없이 독자에게 그의 정체를 밝힌다.

3시간쯤 되는 시간 동안 예수의 정체는 저들에겐 가려져 있지만(16), 독자들에게는 분명하다.

긴장감이 떨어질 수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누가가 이렇게 저들에게 가려진 부활하신 예수님의 동행을 밝히는 것은

우리 또한 삶에서 너무도 자주, 우리와 동행하심이 분명한 주님을 볼 눈이 가려지곤 하기 때문이다(16).

 

독자에겐 일종의 정해진 결론을 향해 가지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겐 모든 일들이 드라마틱하다.

그들의 눈이 열리는 과정 또한 전형적인 말씀과 기도의 형식이지만, 그로 인한 그들 인생의 변화는 드라마 그 자체이다.

말씀을 풀어주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진다(32). 

자기들 영혼의 갈증을 풀어줄 일종의 생수를 맛 본 그들은 예수를 '강권하여' 그를 머물게 한다(29). '기도'다.

"만일 나(루디아)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바울을) 머물게 하니라'(행16:15)

 

낙심하여,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 그 3시간의 동행이, 예수와의 평생의 동행이 되었던 것은, 다른 아닌 말씀과 기도을 통해서였다.

무거웠던 발걸음을 내딛으며, 대답 없는 물음에 피곤했던 저들의 발걸음이, 왔던 길을 되돌아 감에도 기쁘고 즐거울 수 있는 이유는

미처 알아보지 못한 자신들에게 찾아와 꼬박 3시간의 여행길을 함께 하시며, 말씀을 풀어 주시고, 자기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어

그들과 함께 머물고 함께 잡수신 그분이 다름 아닌 부활하신 예수이심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리라(31)!

 

말씀과 함께 사는 50일! 온 교회와 성도가 말씀과 기도로 주께 나아갈 때에, 자기 인생 가운데 동행해 주시는 주님을 보게 되기를! 그 눈이 열려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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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열려야 믿어진다 (누가복음 24 36~53)

2012 4 10일 화요일 묵상

부활한 예수를 눈으로 보고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글로바와 또 한 제자처럼, 예수의 열한 제자 또한 눈으로 예수를 보고 또 만지고도 기쁨과 두려움(41), 물음들과 놀라움의 혼란스런 상태(38) 가운데 있다. „Seeing is believing“이란 말은 한편 맞는 말이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곰브리치가 유명한 <서양미술사>에서 보여주듯 사람은 보는 것을 알기보다 아는 것을 보고, 보는 것을 믿기보다 믿는 것을 본다. 제자들은 눈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 만진다. 우리 생각엔 그럼 다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앞에 섰으니, 믿음이란 것은 더 이상 필요 없어지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부활한 예수를 보며, 그들은 두려웠고, 마음에 '의심(디아로기아=변론, 논쟁, 생각)'으로 가득 차 올랐다.

믿음은 가치의 체계이고, 사실의 체계이다. 기존에 알고 있던 가치와 사실의 체계 속에 편입되지 않는 '사실과 봄'은,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고, 체험하고 기뻐하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41). 믿음은 '한 번 믿어봐, 밑져야 본전이야' 식의 도박이 아니라, 분명하고 확실한 '사태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체계'이다. '패러다임'이란 말이 있다. 무슨 증거를 들이대도 하나의 패러다임에 갇힌 자는 그것을 보면서도 믿을 수 없다. 다른 설명의 방식을 찾게 된다. 찾을 수 없다면 무시한다. 부활에 대해 세상이 갖는 무시가 그런 것이다. 하루살이에게 내일이란 패러다임이 없듯, 한 평생의 사람에게 영생이란 패러다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보면서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만지면서도, 기뻐하면서도, 의심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래서 무언가를 '보는 것', '체험하는 것'을 통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열림'(45a)과 '함께 섬'으로 찾아온다(45b). 예수께서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자 믿음이 생겨난다. '깨달음'이란 헬라말 '쉬니에미'는 본래 '함께 선다'는 말이다. 누구 곁에 함께 서야 이해가 되는 법이다. 마음을 열고, 말씀을 열어, 말씀 곁에 함께 서자 이해되는 것이다.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획과 능력 곁에 함께 서자, 비로소 사태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비로소 깨달아지고, 비로소 믿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이 열려야 믿어지고, 믿어져야 보이고, 만져지는 것이다.

그렇게 마음이 열려진 자들에게 기대되는 최초의 반응, 그것은 '회개' 곧 '마음의 돌이킴'이다(47). '마음의 열려짐'으로 말미암는 '마음의 돌이킴'이 이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다!!!! '말(방언)'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이 일을 하실 것이다. 모든 족속에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로, 하나님의 능하신 일에 대해 선포할 것이다. 마음을 열어, 그들 곁에서 그들로 보게 하고, 마침내 믿게 할 것이다.

믿음이 부족하다면, 성령을 구하며, 말씀 앞으로 나아가자! 기적을 체험해야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성경 곁에 함께 서서, 성령이 말씀을 통해 열어주시는 세계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마음이 열려야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성령이여 오셔서, 우리 믿음 없음을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