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 인생 (누가복음 23장 1절~12절)

2012년 4월 4일 수요일 묵상

어제 민하를 데리러 유치원에 갔더니 아이들이 풍선으로 커다란 부활절 계란을 만들고 있었다. 

풍선 계란 위에 빨간색, 노란색 종이로 장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계란 안엔 공기만 들어 있네요..."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다행히(ㅡㅡ;;) 알아듣지 못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저 계란은 크고 예쁘겠지만, 그 안엔 공기만 들었을 뿐, 생명은 없다'...

 

대제사장, 빌라도, 헤롯 앞에 예수님이 선다. 그들 모두 권세자들이지만, 그래서 뭔가 있어 보이지만, 실은 그 속에 아무 것도 없다. 진리도 없고, 정의도 없고, 생명도 없다. 풍선 같은 존재다. 예수님은 비록 아무 권세가 없어 보이지만, 실은 그 속에 생명이 있다죽음도 어쩌지 못하는 생명이 있다.

 

권력이나 지위가, 물건의 소유가 내 안에 생명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 반대다. 내 안에 생명이 있어야 물건도, 지위도, 권력도 제 길을 찾는다.

 

절반의 사실과 절반의 거짓을 섞어 누군가를 고소하며 자신들의 밥그릇을 챙기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2,5),

정의나 진리에 관심이 없고 복잡하고 귀찮은 일을 피하고자 정치적 손익만을 계산했던 빌라도(6-7),

흥미거리를 찾느라 눈 앞의 메시야에게 쇼를 보이라 요구하다(8), 스스로 쇼를 하는 헤롯(11)...

메시야가 눈 앞에 계신데, 메시야에게  '메시야 노릇'을 하라 요구하고는, 자기들의 권력 게임에 골몰하고 있다.

 

바늘 하나만으로도 뻥 터져버릴 권력이란 풍선을 붙잡고, 그 겉모습을 유지하고, 꾸미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아무런 답을 주지 않으신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분을 찾으러 나왔던 사람들, 생명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던 자들, 그들에게 그분은 답하신다.

논쟁과 증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병든 몸을 건강케 하고, 죽은 영혼에 생명을 주시는 것으로 답하신다. 그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신다.

 

메시야를 앞에 두고, 자기 풍선을 부풀리고 매만지다 순식간에 터져버릴 풍선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무릎을 꿇고 '다윗의 자손이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부르짖고 나아가 그의 생명에 참여하는 인생을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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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소리가 이긴지라 (누가복음 23장 13절~25절)

2012년 4월 5일 목요일 묵상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22)

빌라도의 말대로 예수께서 악한 일을 한 적이 없음에도, 무리들은 그에 대한 '악한 감정'에 사로 잡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소리 지른다(18,21,22).

무슨 악한 일을 한 것이 아니며, 무슨 죽을 죄를 지은 것이 아님에도, 나 또한 누군가에 대한 그런 미움(악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었다.

내가 무슨 죽을 죄를 지은 일이 없고, 무슨 악한 일을 한 것이 아님에도, 내가 그런 미움의 대상이 되어 본 적도 있다.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가 미워지기도 하고,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의 미움이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무슨 죽일 죄를 지은 일이 없음에도... 그런 마음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 생긴다.

 

"무리가 일제히 소리를 질러(아나크라조), 이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놓아 주소서"(18)

무리는 소리를 높여 큰 소리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악을 쓰고' 또 '소리를 지르고' 있다.

누가는 아주 세심하게도, '소리를 지른다'는 단어(아나크라조)를 귀신에 사로잡힌 자들의 외침에 대해서만 쓰고 있다.

그러니 지금 누가는 무리의 소리 지름을, 일종의 '귀신들린 자들의 경험' 같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이유 없는 미움, 이유 없는 악한 생각, 이유 없는 분노.... 이유를 알 수 없기에 쫓아내기도 어려운 복잡한 감정...

그들의 소리가 결국 로마 총독 빌라도의 소리를 압도하고 만다(23).

정신 멀쩡하던 빌라도 조차, 귀신들린 것 같은 무리들의 목소리에 압도되어, 그들 편에 서서,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에 대한 증오를 승인하고 만다.

 

모두가 소리지르고, 목소리를 높이는 와중에, 오직 한 분 예수님 만이 잠잠하시다. 이유 없는 분노와 미움을 능히 다스리고 이겨내신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누가는 본문 자체에 중요한 힌트를 준다. 눅23:23에선 '그들의 소리가 이기지'만(카티스퀴오)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카티스퀴오)'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21:36)에선 기도의 소리가

모든 악한 일을 능히 이긴다. 항상 기도함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힘이 있고 세력이 있어도, 빌라도처럼 무리가 질러대는 '소리'에 압도되지만,

항상 기도함으로 깨어 있으면,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이유없는 악한 생각과 미움을 피할 수 있고, 또 능히 이길 수 있다.

십자가를 앞두고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던 예수님(22:43)이었기에 자기를 위해 우는 이들을 오히려 위로하며,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오히려 용서할 수 있었다.(34) 로마 총독 빌라도의 권력이 압도할 수 없었던 무리의 소리를, 무릎 꿇은 자의 기도의 소리가 능히 압도 할 수 있었다.

"기도의 소리가 이긴지라!" 제자된 우리 삶에 대한 오늘의 묘사가 그렇게 되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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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의 십자가 (누가복음 23장 26절~43절)

- 2012년 4월 6일 금요일 묵상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함께 가기를 각오했던'(22:33) '시몬' 베드로가 아니라,

구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뒤를 따라간다(26).

본래 십자가는 십자가에 달릴 사람이 지고 가야 한다. 그런데 예수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를 구레네 사람 시몬이 지고 가게 된다.

인생이 그런 것 같다. 결심과 각오가 아니라, 하나님이 짐지워 주시는 것을 지고 가게 된다.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을 수도, 억울함으로 받을 수도 있으리라. 내 맘대로 되는 인생이 있을까? 원하지 않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억지로 인생길을 걸어 간다 여긴다면, '시몬의 십자가'를 생각하자. 

시몬은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갔을 뿐'이지만, 예수는 그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예수님 자신 사실 '자기 십자가'가 아닌 '남의 십자가=우리의 십자가'를 짊어 지셨고, 우리를 위해 못 박히셨다.

남을 위한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였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이 지워 주시는 '남의 십자가', '남을 위한 십자가' 곧 '나의 십자가'를 지고

시몬의 뒤를 따라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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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치고 돌아가는 사람들, 무덤까지 따라가는 여인들 (누가복음 23장 44절~56절)

2012년 4월 7일 토요일 묵상

구경하러 모인 무리들과(48), 멀리서 되어지는 일들을 안타깝게 보고 있던 예수를 아는 이들(49)이 가슴을 치고 '돌아간다'(48).

안타까움, 낙망, 슬픔, 눈물...  그리고는..... '돌아간다'.  몇년 전 아버지 장례를 치를 때, 많은 이들이 와서 위로하며, 안타까움과 눈물을 보였다. 그러나 장지까지 가서 하관, 취토, 분묘하는 일은 가족의 몫이었다. 예수를 알고 있던 이들, 예수를 따르던 이들이 아닌, 의로운 공회원 요셉이 예수를 십자가에 내려 무덤에 장사한다. 갈릴리에서부터 예수와 함께 했던 여자들(만)이 무덤까지 예수를 따라간다. 그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된다.

 

가슴을 치고, 울고, 안타까워하고, 그리고는 돌아가는 이들은 그 일이 아직 '남의 일'이다.

가슴을 치고 울고, 안타까워하고, 그리고는 예수를 내려 장사지내고, 향품을 준비하는 이들은, 그 일이 '자기 일'이다.

'자기 일'이기에, 죽은 그를 위해 빌라도를 찾아가 요구하고, 산헤드린의 결정에 반하는 행동을 하여 공회원으로서의 지위에 가해질 수 있을 손해를 감수하고,  가족을 위해 준비했을 무덤을 내어 놓는 것이다. '자기 일'이기에, 장지까지 찾아가고, 그를 위해 부을 향품과 향유를 미리 챙겨 준비하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며 산다는 나는 어떤가? 예수의 일, 예수의 가족된 성도들의 일, 교회의 일, 하나님 나라의 일(51), 그 일은 내게 있어 무덤까지 따라가게 되는 '나의 일'인가? 아니면, 그저 안타까워 하고는 돌아가서 '참 안됐지?' 말 한마디로 발 뻣고 잠들 수 있는 '남의 일'인가? 부활절을 앞두고, 주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기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그의 무덤 앞에 서서 묻는다! 심령이여 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