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채워진 마음 (누가복음 22장 1절~13절)

- 2012년 3월 30일 금요일 묵상

염려한다는 것은 마음이 갈라져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갈라져서 두 가지 생각이 엎치락 뒤치락 하는 것이다.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생각과 잘못될 것이라는 생각이 함께 공존하며 끊임 없이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 그러다 잘못될 것이라는 생각 쪽으로 기울어 지는 것이 염려이다. 하나님이 지켜줄 것이라는 생각과 이런 일은 하나님 소관 밖이라는 생각 사이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생각과 이번 일이 잘못되면 끝장이라는 생각 사이에서 무게 중심이 후자 쪽으로 넘어가는 것이 염려이다.  염려가 문제를 해결해 주는 법은 없으니 갈라진 마음은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깊은 염려에 빠져들게 된다(21:34). 염려를 멈추게 하는 길은 오직 하나, 기도이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생각으로 마음을 빈틈 없이 채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 '갈라지지 않은 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기도로 항상 깨어 있지 않으면(21:36), 갈라진 마음으로 '사탄'이 들어온다(3). 돈을 받고 예수를 넘겨 주고자 하는 유다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6)? 받은 돈으로 그 마음이 채워졌을까? 오히려 마음은 더욱 갈라지고, 생각은 더욱 복잡해졌을 것이다. 그럴수록 사탄이 자리잡을 마음의 영역은 더욱 넓어지는 것이다.

 

안타까운 유다의 모습을 뒤로하고,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게 드실 유월절 식사를 미리 준비해 놓은 한 가정을 만나게 된다(12).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며 유월절을 준비하라 하신다(8). 성내에서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 그 집에 들어가, 집 주인에게 유월절 음식을 먹을 객실이 있나 물으라 하신다(11). 모든 일들이 우연인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제자들이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읽히지만, 실은 그 반대이다. 원문에 따르면 물동이를 가지고 오는 어떤 사람이 제자 둘을 만난다(10). 물동이를 가지고 오는 어떤 사람이 주체이다.  당시 유월절을 기해 찾아온 순례객들을 위해 예루살렘 주민은 유월절 식사를 위한 장소를 제공해줄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큰 다락을 소유하고 있었던 이 가정은 누구인지 모를 순례객을 위해 미리 유월절 만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의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장소를 제공해 주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먼저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빼앗김이 아니라 대접이다. 염려하는 갈라진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으로 꽉 차여진 넉넉하고 여유있는 마음이다. 마가의 다락방! - 제자들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 한 그 곳! 그 집 주인은 이미 기도로 그 마음을 채우고 살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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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식사 (누가복음 22장 14절~23절)

2012년 3월 31일 토요일 묵상

우리를 위해, 자기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시는' 예수님과(19),

영원히 자신을 해치는 일인지도 모르고, 순간의 만족을 위해, 예수를 '넘겨 주는' 유다와(21. '파는 자'='넘겨 주는 자')

예수께서 무엇을 주고 계신지, 자신들이 무엇을 받고 있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식사를 하고 있는 '사도들'...

이 식사는 예수님에게도, 사도들에게도, 유다에게도 잊을 수 없는 식사가 될 것이다(19).

깨달음은 늦든 빠르든 언젠가는 올 것이다. 와야 할 것이다.

십자가를 하루 앞두고, 자신이 '사도'로 세운 제자들과 나누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14).

그 밥을 먹는 제자들은,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사도'로 살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위해 다른 이를 '넘겨 주는' 안타까운 인생을 살 것인가(21)?

매일 밥을 먹으며 생각하고 또 기억해야 한다. 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밥'으로 내어 주신 예수님을!

매일 밥을 먹으며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밥'으로 내어주는 '사도'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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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도 깊다 (누가복음 22 24~38)

- 2012 4 1일 주일 묵상

3 시절 부천에 있는 찬양선교단에 참여하고 있을 때, 친구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네 소리는 바람소리다. 본래 진짜 소리는, 고음을 낼 때에도 한 옥타브 아래 있는 저음 또한 들리는데, 네 소리는 높은 소리만 들린다.“ 그 이후 진짜 소리를 내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다.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목만 상했다.--;;  예수님의 말씀,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아야 한다(26)“는 말씀(-> 명령형이다.)꼭 그 때 내 친구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니 다시 한번 진짜 큰 자로 살기 위해, ‚섬기는 큰 자를 목표로 연습하고, 애써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다들 위로만 올라가려 한다. 그러나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젊은 자=초심자‘, ‚섬기는 자=일꾼의 입장에 자기를 세워봐야 한다. 높이 올라갈수록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의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 다스리는 자가 되어서는 일하는 사람이 먼저 눈에 들어와야 한다. 그렇게 아래로 내려가는 시선 없이 올라갈 수 없다. 올라갔다고 해 봐야 바람 소리일 뿐이다. 외롭고 공허하다. 그 성공을 함께 기뻐해 줄 사람이 없다.

 

제자들 중에 누가 크냐는 다툼이 있었다.(24) 서로가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야망이든 욕망이든, 남들 보다 나은 위치에 있고 싶었다. 이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섬기는 큰 자의 삶을 말씀하시던 예수님은 느닷없이 베드로의 부인과 회복에 대한 예언으로 옮아가신다.

예수님은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올라가려면 내려가야 한다. 큰 자는 강한 자, 성취한 자가 아니라, 연약한 자가 먼저 눈에 들어와 그를 붙들어 주고, 회복하여, 그를 큰 사람으로 세우는 그런 사람이다. 사탄이 너희를 절망에 빠뜨리려고 너희를‘(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을) 요구하였다. 그렇다 너희 모두 나를 버리고 도망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야, 너는 비록 오늘 세 번이나 나를 부인 할 것이지만, 하지만 나는 네 믿음이 중단되지 않도록 기도했으니, 그 실패로 절망하지 말고, 돌이킨 후에 다른 네 형제들, 내 제자들을 세워줘야 할 것이다. 그 때 너희는 큰 자이다.“

산이 높을 수록 골짜기도 깊다. 그 골짜기를 품고 있기에 산이 산인 것이다.

위로 올라가는 시선만 있다면, 바람에 날리는 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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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다 (누가복음 22장 39절~53절)

- 2012년 4월 2일 월요일 묵상

제자들은 '슬픔('뤼페'=근심)'으로 인해 잠들어 있고(45), 열 둘 중 하나인 유다는 입맞춤으로 스승을 판다(48).

유대 지도자들은 비겁하게도 어둠을 틈타 검과 몽치로 예수를 잡으러 오고(53),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던 제자들은 혈기 말고는 기댈 곳이 없다(46, 49).

곁에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는 어둠의 때를 지나면서, 놀랍게도 예수님은, 자기를 잡으러 온 자의 상처를 만져주신다.

 

나였다면, 잠이 든 제자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을 것이다. 나였다면, 입맞춤 하려는 유다의 뺨을 때렸을 것이다. 

나였다면, 밤을 틈타 나를 잡으러온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 기가 막히다는 듯 과장되게 '으하하하'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나였다면, 칼을 빼들고 혈기를 부리는 제자들을 못이기는 척 그냥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나였다면... 시험에 빠져 허우적 댔을 것이다. 베드로처럼...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두려움이 임한다. 기도하고 싶어진다.  

 

어제 주일 예배 중, 한 집사님이 대표 기도하시는 동안, 강대상 아래 무릎을 꿇었다. 보통은 의자에 앉아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지만

어제는 나도 모르게 무릎이 꿇어졌다.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바닥에 납작 엎드려 하나님 앞에 몸을 굽혔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천지보다 크신 하나님의 보좌가 내 앞에 세워지더라.

부복! 완전히 자신을 하나님 앞에 맡긴 자의 자세를 취하자, 그저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던 때에는 느껴보지 못한 '경외감'이 영혼을 사로잡더라.

그의 크심 앞에 압도되어, 감히 어떤 말도 할 수 없더라, 어떤 말도 필요 없더라...

무수히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왔지만(눅5:16, 6:12, 9:18, 11:1), 무릎 꿇은 예수님은 이곳이 처음이다(41).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

바닥에 납작 엎드려,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 나오는 고백을 드리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의 모습처럼, 무릎을 꿇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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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찍이서 예수를 따르다 (누가복음 22장 54절~71절) 

2012년 4월 3일 화요일 묵상

'예수를 따르다(아꼴루테인 예수)'라는 말은 누가복음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의 제자가 되다'를 뜻하는 일종의 전문용어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33)라고 자기의 각오를 밝힌대로, 베드로는 예수의 뒤를 따라갔다. 

 '멀찍이서' 예수를 따라갔다(54). 멀찍이서~!   멀찍이서 예수를 따르는 예수의 제자~!  네모란 동그라미, 세모란 네모.... 라는 말이 그렇듯, 언뜻 말이 되어 보이지만, 들여다 보면 말이 되지 않는 조합... '멀찍이서 예수를 따르는 예수의 제자!'  멀찍이서 예수를 따르던 베드로는 실족하여 넘어지고 그리고 통곡한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예수님 자신조차 십자가를 앞두고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건만, 경고를 받은 제자들과 베드로는 예수님 멀찍이서 - 돌 던질 만큼 멀찍이서(41) - 잠들어 있었다.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했다. 예수를 따른다고 생각했다. 비록 멀찍이서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나쁜 모습을 보이는 누구처럼 예수님 욕은 먹이지 않으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까이 곁에서 그분 기도소리와 땀방울은 보지 못해도, 가끔씩 그의 꾸중과 위로의 말씀은 들으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멀찍이서 예수를 따르며, 그의 제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실족하고, 넘어져도, 그때마다 돌아봐 주시는 예수님의 위로에 힘을 얻어(61), 다시 일어나 멀찍이서 그를 따라가며, 그의 제자라 생각했다.

오늘부터 시작된 고난주간 특별기도회, 기도하던 중 베드로를 깨우던 그 닭 울음 소리가 내게도 들렸던가? 멀찍이서 주를 따르며, 그의 제자라 스스로 속고 있는 수 많은 독일교회 예배당 곳곳에, 오늘도 바람에 이리 저리 흔들이며 닭들이 울고 있다. 그 소리가 우리 모두의 심장 속에서 천둥처럼 울려나기를! 그 소리가 울려날 때, 나를 위해 등을 돌린채 기도하셨을 주님의 눈과 마주치기를! 자기가 무엇으로 살아왔는 지를 확인하고 통곡하기를, 그리하여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그의 제자'가 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한다. 멀찍이서 예수를 따르다 실족한 모든 이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