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기도의 집(누가복음 19장 45절~20장 8절)

2012년 3월 22일 목요일 묵상

기도하지 않으면, 내 마음은 강도의 소굴(렘7:11)이 된다(19:46).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인지, 사람으로부터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 대답의 근거는 그들 스스로가 옳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종교인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인과 상인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있다.

 

기도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 조차 정직할 수 없다.

기도하지 않으면 자기 마음조차 지킬 수 없다. 여러 주인들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을 수 없다.

기도하지 않으면, 주어진 '권위'조차 지킬 수 없다.

기도해야, 자기에게 정직할 수 있다.

기도해야, 하나님 아닌 다른 주인들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을 수 있다.

기도해야, '권위'의 근원이 어디인지 비로소 말할 수 있다. 기도해야, '권위'의 근원이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 마음은 강도의 소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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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누가복음 20장 9절~18절)

2012년 3월 23일 금요일 묵상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16)

 예수의 비유를 들은 백성들은, 비유속에 등장하는 농부들과 그들에 의해 자행된 일들에 대해  '그것은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탄식과 분노 그리고 바램을 다 드러내는 말, '메 게노이토'를 자기도 모르게 내뱉고 있다. 결코 그럴 수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주인이 보낸 종을을 때리고, 모욕하고, 빈 손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넘어,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자기 소유로 삼고자 한 이들은 진멸되어 마땅하다.비유를 들은 백성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16).

 

 그러나 그 비유를 듣고 다른 생각을 한 이들 또한 있었다. 그 비유를 듣고 즉시 예수께 손을 대고자 한 이들이 있었다(19). 예수는 하나님의 정당한 '상속자'가 아니며, 자기들이 오히려 '상속자'로 합당하다 여기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로 인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극은 결코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죽은 아들을 안고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 뒤로 막이 내리지 않을 것이다.)

저들에 의해 버림받고 거부된 돌이 오히려 모퉁이 돌이 될 것이다. 그 돌을 기점으로 새로운 건물이 지어질 것이다(사28:16). 버림 받고 거부된 돌을 통해 우리 눈에 기이히 여겨지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 돌이 모든 것을 부술 것이다(18). 그 돌이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될 것이다(단2:34).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나는 백성들처럼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라는 마땅한 반응을 보이는가? 아니면 다른 이들처럼 생각이 복잡해 지는가?

소출 중 일부를 달라시는 주님의 말씀에 바로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가져 가십시오"라는 마땅한 반응을 나는 보일 수 있는가? 아니면 생각이 복잡해 질 것인가?   "메 게노이토!! 물론이고 말고요.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지요." 언제든지, 즉시(!) 그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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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말을 하며 사는 사람 (누가복음 20장 19절-26절)

2012년 3월 24일 토요일 묵상

누군가를 '엿보며' 사는 사람들, 자기 안에 '진심'이 없는 사람들, 그들은 '자기 말'을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율법학자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엿보다, '스파이'를 보낸다(20). 그들은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께 나온다.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라는 말에서, '~인 척 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기 생각인양 말한다'라는 뜻이다.

다른 이들의 판단과 생각 아래 자기를 놓아두고, 자신을 그런 사람인양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안에 '진심'이라는 것이 없다. 그들의 말은 그러니 '자기 말'이 아닌, '남의 말'이다.

그런데 남의 말을 자기 말처럼 자꾸하다보면 스스로도 속게 된다. 

이 정탐들이 꼭 그러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도 되느냐는 질문에, 예수는 데나리온을 보이라 한다. 그들이 보이자, 가이사 형상이 새겨진 돈은 가이사 에게 주라고 한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로마 화폐가 아닌, 두로 화폐를 사용했다. 그게 경건이라 생각하고 가르쳤다.

그런 그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두로 화폐가 아닌, 데나리온이었다.

가르치는 말에 진심이 없다. 권위 있는 랍비 누군가가 한 말을 자기 말인양 말하며, 스스로도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말씀하시는 분'이다(21). 그 안에 진심이 있고,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다. 하나님의 길에 대한 사랑이 있다.

그러니 그분은 남의 말이 아닌, 자기 말을 한다.

오늘도 나는 수 많은 말을 하며 살 것이다. 나는 얼마나 '바로' 말하고, 참으로 말하며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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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누가복음 20장 27절~40절) 

- 2012년 3월 25일 주일 묵상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 았다"(38).

이 말을 이렇게 바꿔 쓸 수는 없을까?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다." ->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만이 참으로 살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 가면서 여전히 죽어 있을 수는 없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 가지 않으면서 살아 있을 수는 없다. 

부활 이후 삶의 양태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35). 그 구체적인 변화를 지금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저 세상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이 세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지' 않는다면, 진실로 생명을 누리는 부활은 없을 것이다.

타는 가시나무 떨기 앞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 생의 신발을 바꿔 신은 모세처럼,

나 또한, 사두개인 같은 '상상의 사고 실험' 속에서가 아니라,

몸으로 살아 가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며, 그 앞에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