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을 만나다 (누가복음 19장 1절-10절)

2012년 3월 19일(월) 묵상

 

예수께서 선택하신 길은 - 여리고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급한 경사라는 말로는 턱없이 부족한 엄청난 오르막 길을 올라간다.

십자가의 길은 그렇게 이미 시작되었다. 제자들에게 '인자의 넘겨짐과 고난과 모욕,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설명하지만 그들은 알아 듣지 못한다(18:34).

외로운 길이다. 눈 앞에 십자가가 어른 거린다.

나라면 도저히 마음이 잡히지 않았으리라.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이 원망스럽고, 문득 문득 분노가 올라왔으리라.

내가 왜 이런 험한 길을 올라 가야 한단 말인가? 답답함 속에 원망도 했을 것이다. 
 
그런 길을 가는 중에, 여리고로 들어 갈 때, 한 맹인이 예수의 이름을 소리 높혀 부른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18:38)

 "나사렛 예수"(18:37)가 지나간다는 소리를 들은 맹인의 입에선, 예수의 정체에 대한 바른 고백이 흘러 나온다. "다윗의 자손이여"

자기의 곤궁 속에 부르짖는 그 소리가, 제자들 조차 알아주지 못하는 외로운 길을 걷고 예수에겐, 하늘 아버지의 소리처럼 들려왔을까?

그를 불러 고치신다. 그리고 여리고로 들어간다.

5절에 예수께서 삭개오를 찾아가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일정 수첩 속엔, 아마 "삭게오와 몇월 몇일 여리고 뽕나무 앞에서 만남"이라 적혀 있었으리라.

생각해본다. 나라면, 십자가를 앞두고, 마음이 갈리고, 가야할 길 조차 험산 준령이라면,

그러면 '몇월 몇일 누구와 어디서 만나기로 약속 되어 있음' 이라는 메모를 보았을 때, 혹시 피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어디 잠시 누워서 쉬고 싶지는 않았을까?

십자가를 앞두고, 좀 더 기도하고, 좀 더 마음을 다잡을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여리고 소경의 그의 사명과 정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인정("다윗의 자손이여") 때문에 더욱 힘을 얻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런 것이 필요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인지, 예수님은 약속된 장소에 찾아가 '삭개오'를 만나신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

예수님의 활력 넘치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목소리에 젖어 있는 약간의 들뜸과 섞여 있는 웃음 소리도 들려온다.

삭개오가 감동한다. 그리고 반응한다.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는 찾을 수 없었던, 자기를 알아 준 예수님으로 인해, 가지고 있던 것을 포기한다.

오늘 아침 묵상의 시간, 예수님의 수첩엔, 내 마음 속의 수첩에서 처럼, '3월 19일 아침, 홍성일 목사와 그의 집에서 만남'이라 적혀 있었으리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험한 길, 십자가를 앞 두고도, 그는 한 사람과의 만남에 온 마음과 힘을 쏟으신다. 찾아가시고, 약속을 지키신다. 그를 기뻐하신다.

3월-4월 해결해야할 많은 일들이 앞에 놓여 있다. 오르막길이다.

하지만 오늘 내 마음 속 수첩에 적혀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오늘 내게 없다.

오늘 아침 주께서 나를 불러 주신 그 음성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기대가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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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 (누가복음 19장 11절~27절)

2012년 3월 20일 (화) 묵상

열명의 종들에게 각각 한 무나씩을 맡기고, 한 귀인이 왕권을 받으러 떠나간다.

그가 언제 돌아 올 수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사이 동일하게 한 무나씩 받은 이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갔다.

어떤 이는 한 무나로 열 무나를 남겼고, 어떤 이는 다섯 무나를 남겼다.

어떤 이는 한 무나로 장사하여 둘, 또는 셋이나 네 무나를 남겼을 것이다.

어떤 이는 한 무나로 장사하다 다 망해먹었을 수도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주인의 소유를 묻어 놓고 살면서, 자기는 주인의 것을 건드리지도, 손해를 끼치지도 않고 살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귀인이 왕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반역을 꿈꾸던 자들은 처형되고, 충성한 자들은 각각 몇 고을을 다스릴 권세자로 세움을 받게 되었다.

 

열명의 종들은 똑같은 한 무나씩을 받았지만, 각각 다른 정도의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능력의 문제라고, 운이 좋았다고, 나도 아홉 무나까지 남겼다가 마지막에 잘못되어 다 말아먹었다'고...

지금 그렇게 10무나 남긴 사람을 폄하하고 있다면, 나는 마지막 한 무나를 돌려주러 온 그 종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한 무나로 열 무나를 남긴이는 물론 능력도 있었을 것이다. 운 때가 잘 맞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무나로 열무나를 남기기 위해, 그 종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을까? 얼마나 수고하며 일했을까?

생각하면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능력이 아니라, 성실이 문제다. 지극히 작은 것에 대한 충성이 문제다(17).

하루를 살더라도 주의 충성스런 종으로 살고 싶다. 

자유라는 이름 하에 반역을 꿈꾸고, 그의 왕됨을 거부하는 것은(14), 지나간 날들로 이미 족하다.

오늘 귀인이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 기뻐 그를 맞이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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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새끼의 주인  (누가복음 19장 28절-44절)

2012년 3월 21일 수요일 묵상

"맞은 편 마을에 가면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있다. 그것을 풀어오라."

"그것을 푸는 것을 보고 누가 묻거든, '그것의 주인이 쓰시겠다고 합니다.'라고 말하라."

제자들이 가서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것의 주인들'이 묻는다. "어찌 이런 일을 하느냐?"

제자들이 답한다. "그것의 주인이 쓰시겠다고 합니다."

내게 속한 모든 시간, 재물, 생명... 물론 내 소유이지만, 궁극적으로 '주님'의 것이다.

'나귀 새끼 한 마리 함부로 취해 갖지 않으시는' 그것들의 참된 주인이 쓰시겠다 하면, 내어주어야 할 것이다.

내 생명과 존재의 최종 소유권자는 누구인가? 오늘 나의 삶이 답이 되리라.(19:28-40)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시면서 예수님은  '보살핌을 받는 날'에 대해 말씀하신다.

'a visiting day' - 그가 방문하시는 날은 '심판의 날'일 수도 있고(벧전 2:12), '구원의 날'일 수도 있다.

그의 왕되심을 바라며, 왕의 귀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종에게, 그 날은 기쁨과 구원의 날이 될 것이고

그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종에게 그 날은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심판 가운데서도 '평화'를 창조하시는(42) '평화의 왕'인 예수를 따라,

'나의 나귀 새끼'를 그에게 내어 주고 '예루살렘(평화의 도시)'으로 들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