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익한 종 (누가복음 17장 1절~10절)

2012년 3월 13일(화) 묵상

어느 목사님이 흰 양말을 신었다고 실족하는 분도 있었다고 하니, 사람 사는데 실족함이 없을 수는 없다(1). 그럼에도 예수님은 실족하는 자들이 아닌, 실족의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경고하신다(2). '연약한 사람을 실족케 했다면, 차라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 자못 황당해 보이는 이 경고는, "이웃이 회개하면 받아주고, 범죄하면 꾸짖으라"는 이어지는 문단을 통해, '당신에겐 당신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살아갈 ' 책임이 있다'는 요구로 읽혀진다. 실족한 자를 외면하지 말고, 네 탓이라 몰아 붙이지 말고, 구제 불능이라 타박하지 말고 그를 일으켜 함께 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제자들은 예수님께 믿음을 더해 달라고 간구한다(5).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더욱 황당하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다면 너희가 말했을 것이다. '뽕나무야, 뿌리 채 뽑혀 바다에 심겨져라.'(6)"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있는 사람들로 붐빌 바다에 심겨진 뽕나무는 그곳에서 푸르게 자라갈 수 있을 것인가?

'무익한 종'에 대한 말씀이 이어진다. 힘들게 일하고 돌아온 종에게 '아이고 고생했소. 어서와서 앉아 쉬시오'라고 말할 주인이 없고(7), 오히려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시중들고, 그 후에야 네 먹을 것을 먹어라'라고 말하는 주인만 있을 뿐이다(8). 그런데 바로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모두 "나는 '주인'이고, 너는 '종'이다"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주인'의 자리에서 '종'의 역할을 남들에게 기대한다. 그러니 감사나 격려의 좋은 말이 나갈 수가 없다. 열심히 일하고 들어와, 누군가의 인정이 필요한 자에게 '수고했소, 어서 앉아 쉬시오'라고 말해줄 사람이 없다. 감사와 격려는 못해줄 망정, 오히려 질책의 말이 들려온다. 그는 '실족'하게 되고, 그에게 있어 상대는 '죄를 범한 자'가 된다. 하루에도 일곱번씩 '죄'를 짓게 되니, 하루에도 일곱번씩 뽕나무가 아닌, 연자 맷돌이 매어져 바다에 던져지는 일이 벌어진다.

함께 살아감이 서로에게 상처와 실족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종'의 자리에 서야 한다. 그것도 '무익한 종'의 자리에 서야 한다. '주인'은 당연히 상대방이다. '종'인 나는 하루 종일 수고하고, 돌아와서도 '감사나 격려'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주인의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그를 수종들어야 한다. 이 무익한 종의 모습을 우리는 천지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서 보았다.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십자가를 앞에두고 식사시중꾼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무익한 종' 의 진면목을 본다.

'무익한 종'으로의 하루가 때로 버겁게 느껴질 때, 그 무익한 종의 버거운 하루를 알아 주시고, 지친 그에게 '수고 했다. 어서 와서 앉아 쉬라'는 말이 얼마나 필요한지 아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힘이 된다. 동료 종들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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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 기쁨의 근원(누가복음 17장 11절-19절)

2012년 3월 14일(수) 묵상

 

예수께 찾아 나온 열명의 나병환자 모두가 제사장에게로 가는 중에 고침을 받는다. 하지만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께 나와 감사한다. 감사와 기쁨은 다르다. 고침 받은 자들의 기쁨이 어떠했으랴?! '드디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제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 갈 수 있다.' 9명의 유대인들은 그러나 자기들의 기쁨 중에 감사를 잊었다. 감사는 그 기쁨의 사건이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고, 다른 누군가의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느낄 때 터져 나온다. 9명의 유대인들은 새로운 삶이 비롯된 근원인 예수님을 놓치고, 자신들의 미래를 열어줄 제사장에게로 서둘러 가고 있다. 기쁨이 감사를 압도해 버렸다. 그러나 근원을 잃은 기쁨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제사장의 정결 선언이 필요치 않았던 사마리아인에겐, 그의 기쁨에 젖은 눈 앞엔, 이 모든 놀라운 일이 비롯된 근원인 예수님이 더욱 크게 보였다. 몸이 나은 것을 확인한 순간, 이 모든 은혜가 시작된 예수께로 돌이킨다. 그리고 그에게 경배한다(16).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단순과거'가 아닌 '완료' 동사다!!!  돌아간 9명의 유대인들에게 '구원의 은혜'는 '과거 속의 한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돌아와 경배하는 1명의 사마리아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는 여전히 지속되는 '현재의 사건'이다.  감사를 놓친 과거의 기쁨은, 오히려 오늘의 불평의 이유가 된다. "왜 이제야 나를 고치셨는가? 옆집 친구는 성공했건만, 나병으로 허송한 나는 실패자로 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럴바엔 왜 나를 고치셨는가?....."  그러나 기쁨의 근원인 예수께 나와 그에게 경배하는 자에게, 어제의 기쁨은 오늘의 기쁨으로 이어진다.  구원과 기쁨의 근원인 예수께 나아가자!   그에게 경배하며, 감사함으로 영광을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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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누가복음 17장 20절-37절)

2012년 3월 15일(목) 묵상

마태가 24장 종말 강화에서 기록하고 있는 말씀 중 일부가 바리새인의 물음에 답하며(20) 제자들에게 주어진다(22). 바리새인의 물음, 곧 '어느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까?'(20)라는 물음은 당대 가장 격렬하게 논의 되던 주제 중 하나였다. 포로에서 돌아 왔지만, 아직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례미야의 70년에 대한 다니엘의 70 이래로의 재해석에 대한 해석이 끊이지 않았었다. 당대 익숙하다 할 수 있는 이 질문에, 예수님은 저들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답을 하신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게 오는 그런 것이 아니다. '보라,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메시야 시대를 대망하며, 날짜를 계산하며, 그 나라에 들어갈 자들의 조건을 규정하며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 사유의 모든 지반을 뒤흔드는 것이다.

"그 나라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포로기와 방불한 상황 가운데 있는데, 어떻게 그 나라가 지금, 그들 가운데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여호와의 날'을 예수 자신을 중심으로 다시 표현하는 말이 분명한 '인자의 날'은 그 하루를 보고자 기다린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22) 그 임하는 곳을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23). 사실 인자의 날은 이미 임해 있기도 하고(21), 임할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인자가 고난을 받고, 이 세대에 의해 버려져야 한다'는 사실이다(25). 그렇지 않은 인자의 날은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자기 목숨을 잃지 않는 자는' 그 날을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33).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때, 어느 곳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잃는 자에게만 임하고, 그 때에만 임하기 때문이다.

'때'를 묻고 있다면, 지키고 싶은 것,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을 짓고 사고 팔면서도 사람들은 항상 '메시야의 때'를 기다린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포기하라 하면 롯과 같이 지체하고 머뭇 거린다. 소알이라도 지키고 싶어 한다. 그들에겐 오늘도, 또 내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인자의 날'은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때와 장소를 묻고 있지 않는 자, 자기 목숨을 잃는 자, '먼저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예수 곁에 있는 자, 그 뒤를 따르는 자 - 그들에게 인자의 날은 이미 임해 있고,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의 인생과 삶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주검이 있는 곳엔 독수리가 모이고', 자기 목숨을 잃은 자에겐 하나님 나라가 임함다(37). 그러니 잃은(/을) 것을 돌아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