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장 – 무엇이 더 크냐? (마23:13-24)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17)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19)

성전 안의 금보다 성전이 더 크고, 제단 위의 예물보다 제단이 더 크고, 하늘 보다 하나님이 더 크다. 누가 이를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성전이 아닌 금으로, 제단이 아닌 제물로 맹세하게 하였던 듯하다. 이는 맹세의 남용을 막고, 행해진 맹세를 반드시 지키게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신명기 6장 13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경우 사람은 함부로 맹세할 수 없으며 맹세한 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가 있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것이며 누가 있어 이 맹세를 감당할 것인가? 그래서 맹세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늘 또는 성전 등으로 바꾸어 불러 맹세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맹세가 남용되기 시작했다. 맹세한 자가 불리할 경우 자기는 하늘을 말했을 뿐 하나님을 언급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 되니 말이다.

그리하여 다양한 맹세의 형식이 생겨났고, 그 가운데 바리새인들은 맹세할 경우 반드시 지켜야 할 특정한 맹세의 형식들을 규정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아마도 성전의 금, 제단의 예물이었을 것이다. 특정 형식으로 이루어진 맹세는 반드시 지키도록 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맹세의 무거운 짐에서 사람들을 가볍게 하는 동시에 이루어진 맹세는 반드시 지키도록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맹세의 형식을 세부적으로 규정해가면 갈수록 맹세는 점점 그 본질을 잃게 되고 만다. 신명기 6장 13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오직 그만 섬길 것을 말씀하시는 문맥가운데 나타난다. 맹세에 대한 이 말은 너희는 너희에게 자유와 땅과 삶을 주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라는 뜻이 된다.

계명이 출발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우리의 그의 자녀 됨이다. 그 근거를 놓치게 되면 포도주를 마실 때 부정한 곤충을 걸러내기 위해 망에 부어 먹는 등 작은 규칙들을 지키는 것만으로 자신이 깨끗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정작 부정한 짐승인 약대를 삼키면서 이들은 그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만다(24).

작은 것이니 소홀히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의로움과 자비와 충성됨이 적용되어야 하는지 알고 살아가는가가 관건이다. 의롭고 자비로우며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 성품을 따라 우리를 대하시며 우리를 그러한 자들로 키워가시는 우리 아버지임을 알고 살아가는 가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선생님, 나의 아버지, 나의 인도자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