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장 – 나귀 두 마리(마21:1-12)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무리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환영한다. 여기 무리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도시민들이 아니라,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이다. 예수를 따라 왔던 사람들이다. 예루살렘 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반응은 다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더라.“(10-11)

온 성이 소동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태어난 이가 어디 계시냐?‘는 동방박사의 말에 온 도시가 소동했듯 이스라엘의 왕으로 예수가 입성하자 온 도시가 소동한다. 지진에 흔들리듯 흔들린다. 다윗의 자손으로 메시아가 오면 온 성이 기쁨으로 맞아야 할 ...텐데 지진 앞에서 당황하는 사람들처럼 온 성이 소동하고 뒤 흔들린다.

메시아의 임함이 기쁨이 아닌 것은, 누군가에게 뺏길 수 없다 여기는 ‘자기의 것들‘ 때문일 것이다. 헤롯은 자신의 왕위가, 대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기득권과 체제의 안녕이, 도시에 살던 사람들에겐 당연한 듯 찾아오는 안정적인 내일이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면서, 진정한 왕 메시아 예수는 나귀를 탄다. 황제의 말이 아닌 멍에 매는 짐승을 탄다. 타고 가서 사람들의 것을 빼앗기는커녕, 그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준다.

“만일 누가 묻거든, 그것들의 주인이 쓰겠다고 하여라“(3). 그렇다 그가 그것들의 주인이다. 나귀 두 마리의 주인일 뿐 아니라 세상 만물의 주인이고, 우리 존재의 주인이다. 소유권이 그에게 있다. 그런데 천지의 주권을 가진 그 왕이 겨우 나귀 두 마리를 잠시 사용하도록 내어달라 요구한다. 그 앞에 감히 생명을 내어 놓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내게 맡겨 놓으신 '나귀 두 마리' 기꺼이 내어놓고 그 분 가는 길 따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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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 성전, 기도의 집 (마 21:12-22)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유월절을 맞아 온 땅에서 모여든 많은 순례객들의 환영을 받으며,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나귀를 타고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예수 당시 예루살렘 인구는 학자들 간에 차이가 있지만, 적게 잡았을 때 5만명 정도로 본다. 하지만 유월절 같은 큰 명절엔 순례객 수로 인해 전체 인구가 15만 명에 이르렀을 것이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다. 예수가 성전에서 병자들을 치료할 때 아이들이 외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는 그들이 무엇을 알아서가 아니라 어제 들은 무리의 소리를 따라한 것이었으리라. 그럴만큼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센세이셔널했다.

비록 예수가 멍에 매는 짐승인 나귀새끼를 ...탔지만, 그것은 스가랴 선지자의 메시야 예언의 성취였다. 최소한 예수를 따라왔던 민중들은 예수의 행동을 스스로를 메시야-왕으로 나타낸 행동이라 이해했다. 그래서 겉옷을 길 바닥에 깔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쳤던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중요한 인물이 된다. 예루살렘 입성이 일요일이고, 성전 청소라 불리는 본문의 행위는 그 하루가 지난 월요일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마치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바로 성전에 들어가신 것처럼 읽혀진다(12). 그러니까 다윗의 자손, 메시야, 왕,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예수가 한 첫 번째 행동은 성전에서의 상징적인 행위였다.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에 놓여 있던 것은 성전과 율법이었다. 유대인들은 성전과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 이스라엘의 메시야로서 예수는 이스라엘 종교의 심장부에 놓인 성전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성전에 들어가서 매매하는 자를 내어 쫓고, 돈 바꾸는 사람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뒤 엎었다. 이 행동은 이방인의 뜰이라 불리는 성전 뜰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제사에 필요한 짐승의 매매와 환전이 이루어졌다. 당시 성전세는 로마 동전이 아닌 두로 동전을 사용하여 내었는데, 로마 제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로마 동전을 두로 동전으로 바꾸어 성전세와 기타 다른 헌물, 십일조 등을 드렸다.

이런 일들은 사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상황에서 보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먼 곳에서 짐승을 가져 올 수 없으니 예루살렘에 와서 짐승을 사게 된다. 또 성전세를 위해 돈도 바꾸어야 한다. 그러니 성전이 유지되고 성전 제사가 유지되는 한, 이러한 형태의 일들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축제로 들뜬 사람들로 붐비는 성전에서, 성전 제사 체제 전체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이는 상징적인 행동을 했던 것이다. 이 일은 대제사장들에게 바로 보고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어제 온 도시를 요동시키며 예루살렘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AD 6년 갈릴리의 유다가 인구조사에 반대하며 반역을 일으켰을 때, 2천명이 잡혀 십자가형을 당했었다. 예수 대신 놓여난 바라바 또한 아마도 로마에 반대하던 열심당원이었을 것이다. 명절, 본디오 빌라도가 예루살렘에 와 있는 유월절에, 다윗의 자손 메시아!라는 환호 속에 예수가 입성했으니 유대 당국자들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소요가 일어나면 대대적 진압으로 번질 수 있고 잘못하면 성전 체제 자체가 파괴될 수 있다 생각했을 수도 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요 11:48). 메시아 운동이 결국 성전의 파괴와 민족의 멸망으로 끝날 수 있다 여겼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는 요주의 대상으로서 그의 모든 행동이 보고되었을 것이다.

그런 예수가 성전에 들어가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내고 환전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상과 의자를 뒤 엎었던 것이다. 워낙 넓은 곳이었으니 실상은 한 쪽 구석에서 일어난 미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바울이 성전에 와서 소동이 일어났을 땐 안토니우스 요세에 주둔하던 로마 군대가 출동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비록 그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 일거수일투족이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예수가 행한 이 행동은 결코 하찮은 에피소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주목했고, 그의 말과 행동에 집중했다. 이러한 집중적인 관심 속에서 행한 예수님의 행동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아야 하는데,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13)

예수의 행동과 말씀은 성전이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곳인가? 묻게 만드는 행동이었다. 장사하는 자들에게 성전은 먹고 사는 터전이었을 것이고, 대제사장들에게 성전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고 발휘하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예수에게 성전은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집이었다.

기도란 무엇일까? 문맥 속에서 기도하는 자들의 모습과 대조되는 자들은 장사하는 자들이다. 기도란 거래도 장사도 아니다. 기도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 놓고, 내가 받을 몫을 흥정하는 거래가 아니다.

기도가 무엇인지를 그림처럼 보여주는 자들이 있다. 예수의 성전 행위 이후 예수를 찾아온 맹인들과 다리 저는 자들이다(14). 명절,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그 곳에서, 예수가 성전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축구장이 몇 개씩 들어갈 정도의 거대한 성전에서 다른 이들도 아닌 맹인과 저는 자, 보지 못하는 자들과 움직이기 어려운 자들이 예수에게 나아왔다.

"예수께 나아가면 그가 고쳐줄 것이다. 그가 온전케 할 것이다" 그 믿음으로 예수께 나아왔다. 그 모습 자체에 이미 수 많은 말이 담겨있다.

거래를 하려면 스스로 뭔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어야 하고, 자신이 뭔가 가지고 있다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런 것이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예수께 나아간다. 그가 자신을 고치기를, 그가 자기를 온전하게 하기를 소망한다. 고쳐주시면 무엇을 하겠습니다도 아니다. 그저 은혜를 구한다. 그런데 예수가 그들을 고친다. 이것이 기도고, 이곳이 성전이다.

“제가 지난 일주일 동안 참 많은 죄를 짓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 나와서 찬양도 하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 이건 여전히 거래다.

성전을 위해 수 많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다윗이 말한다. “우리는 주님 앞에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우리에겐 희망이 없습니다"(대상 29:15).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다윗, 왕권과 재물 등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여겨지는 다윗이 맹인과 다리 저는 자들처럼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전에서 사고 파는 자들, 성전에서 밥 벌어먹고 살고 있는 사람들, 이들은 성전을 통해 밥을 벌어먹고 살고 있으면서도, 그곳에서 하나님은 만나지 못한다. 성전이라는 하나님의 임재와 용서와 은혜를 상징하는 곳에서, 하나님 덕분에 먹고 살고 있으면서, 정작 하나님은 만나지 못한다.

이들에게서 제물을 사고 돈을 바꾸면서 성전을 찾는 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웃돈을 치르고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온전한 제물을 바치고 성전에 합당한 돈으로 예물을 드리면서 정작 성전에서 만나야 할 하나님은 만나지 못한다. 하나님께 나아가 그에게 기도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기도가 아닌 거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거래를 하고 살아간다. 거래는 자존심 때문에 일어난다. 나도 뭔가 내줄 것이 있다는 것이다. 뭔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거래를 하는 것이다. 그 뭔가의 가장 뒤에 놓여 있는 것이 자존심이다.

제물은 왜 드리나? 자신이 죄들 지었으니 드린다. 유월절 양은 왜 잡나? 자신이 죽어야 할 자라는 인정이다. 바로 이런 일이 이루어지는 곳이 성전이다. 정직하게 자신을 바라 볼 때 눈 멀고 다리 저는 자임을 보는 것이다. 온전한 제물로 드려질 수 없는 자신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 저를 고쳐주십시오!

그런데 '가장 정결한 짐승을 사서 하나님께 바쳤고 거룩한 돈으로 바꾸어 하나님께 헌금을 드렸다는 것으로 눈멀고 다리 저는 자신의 모습을 가리는 것' 그것이 지금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래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는 것이다.

성전 청소 이후, 예수는 베다니(='무화과의 집')로 가서 하루를 머문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예루살렘으로 오시다가 무화과 나무를 본다. 잎이 무성하다. 그런데 열매가 없다. 저주하자 말라 버린다. 그 말라 버린 모습 - 그것이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무성한 무화과 잎으로 가리고 있는 것이다.

깨끗한 짐승으로 제물을 삼아 드렸다, 두로 돈으로 드렸다는 것으로 당장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이 필요한 자들을 안심시키고 무화과 잎사귀로 옷을 하나씩 해서 입혀주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성전이다. 그러나 성전은 그런 곳이 아니다. 성전은 거래가 아닌 기도하는 집이다.

예수는 거래하는 자들, 장사하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어 쫓는다. 그러나 기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맹인과 다리 저는 자가 인파를 헤치고 예수께 나가듯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 그렇게 기도하는 자들, 그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성전은 기도의 집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