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7장 – 그리스도인의 영광 (마17:1-13)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와 십자가를 지고서야 따를 수 있는 제자의 길에 대해 말씀하시고서, 예수는 3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 그곳에서 자신의 영광의 일면을 보인다.

그 셋은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이다. 베드로는 그의 신앙고백을 따라 교회가 서야 하는 반석이었고, 야고보는 사도들 중 최초의 순교자였으며, 요한은 사도들 중 아마도 가장 늦게까지 주의 사랑을 전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예수는 첫 순교자와 마지막까지 교회를 지킨 자와 교회의 반석이 될 세 사람을 데리고 올라가서 자신의 영광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영광을 보여주시고 내려오시면서 예수님은 이상한 당부의 말씀을 하신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   부활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럼 왜 보여주었는가?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명의 제자들은 부활 이전에 이미 주님의 영광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말하자면 감추어진 영광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마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제 십자가의 길을 가고 죽음의 길을 간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오해하지 말아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메세지는 "비록 내가 천시 받을 만한 모습으로 천시 받는 길을 가지만 내 본성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니 겉모습에 속지 말아라."라는 것이 아니다.   '행색이 초라해 보였는데 알고 보니 의사였더라'와 같이 지금 예수님의 영광의 나타냄은 '사실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야, 내 직업이 이 정도 되는 사람이야, 그러니 겉모습만 보고 오해하지 마!' 라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이 길, 지금 제자들에게 따라 오라는 이 길, 그 길이 영광스러운 길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 길을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길에서 영광을 보고 이 길을 따라 오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 대단한 집 자식이더라, 압구정에 빌딩이 있고, 강원도에 농장이 있더라가 아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이 길, 세례 요한이 간 그 길이 영광의 길이라는 것이다(12).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이 가시는 길이더라, 하나님의 아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더라!는 것이다.

이 영광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났던‘ 주님처럼(2)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마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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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 17:14-23)


예수님은 이 세대를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17)라 부른다. 여기서 패역하다는 말은(‘디아스트레포‘) 부패했다는 말이 아니라, 구부러졌다는 뜻이다.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라는 것이다. 곧은 것을 굽게 하고, 정당한 것을 잘못 사용해먹는 시대라는 말이다. 이 시대는 믿음이 없고, 구부러진 세대다. 아니 믿음이 없어서 구부러진 세대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다면 그는 구부러지지 않은 길을 갈 수 있다. 문제는 믿음이 없음이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지 않음이다.


사람들은 믿음 하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말을 생각하곤 한다. 실제로 마태 17장 본문과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는 마가복음 9 23절에서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에게 이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도 그 의미는 언뜻 들리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사람들은 믿음 하면 할 수 있다 해보자!“라는 자기 최면적인 것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건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 없음이다. 믿음은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거나,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소망이 아니라, 그 일이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마땅함에 대한 것이다. 마땅함에 대한 헌신이 믿음이다.


마땅함에 대한 헌신이 없기에 사람의 길이 구부러지는 것이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하지 못했습니까?“(19) 능력을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너희 믿음이 적은 까닭이라며 능력이 아닌 믿음을 문제 삼는다. 루터는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로 구부러진 존재라 말하며 이를 죄라고 했는데, 죄는 말 그대로 믿음이 없어 패역한(구부러진)‘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이 있다면, 너희는 이 산을 향하여 말할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저리로 옮겨져라!라고. 그러면 그것이 옮겨질 것이다.“(20) 믿음은 마땅히 되어야 할 것에 대해 말하게 한다. 마땅히 되어야 할 것이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서 비롯되는 당위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신뢰이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다시금 하나님의 영광(=‘그의 그다움‘)을 확인한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확인한다. 자기 인생과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시야를 확인한다. 그리고 내려와서 믿음의 길을 간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17: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