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고난주간 묵상(금요일) - 마가복음 15장 14-41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새벽녘 빌라도의 관정에 끌려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네 말이 옳도다’라고 짧게 답하신 이후,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직전까지 예수님은, 마가복음에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로마 군병들의 채찍질과 희롱에도, 침 뱉음과 모욕에도, 예수님은 말 없이 그 모든 일들을 그저 당하셨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군중들과 제사장, 심지어 함께 못박힌 강도들의 조롱에도 예수님은 묵묵히 그 조롱을 감내하고 계셨습니다.

아침 9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12시 온 땅에 캄캄함이 임하기까지 이어진 수 많은 이들의 모욕과 비웃음 속에서도, 오후 3시 마침내 돌아가시기까지, 한 마디의 항변이나 원망도 없이, 모든 고통을 그저 겪으셨습니다. 새벽부터 아침까지 이어져온 모든 매질과 채찍질로 찢길 대로 찢긴 몸으로, 십자가 형을 받은 죄인인 그 당사자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를 질 한 올의 힘까지도 병사들에게 뭉개진 채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그는 마취의 효능이 있는 몰약을 탄 포도주를 거절하십니다. 한 올의 고통 조차도 자기 몸으로 다 겪어야 한다는 듯이…

그리고 그 긴 고통의 끝에서 예수께서 외치신 단 하나의 말씀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였습니다.

참으로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완전히 버린 듯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는 어떤 변명, 어떤 항거, 어떤 방어도 없이, 어떤 신적인 능력도 어떤 하나님의 보호도 없이, 완전히 죄인들의 손에 내 맡겨진 채, 너무나도 참혹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수 있나이다.”(시편 22편)

사람들의 여론과 지위를 지키는 것이 유일한 선택 기준이었던 빌라도, 법 앞에 선 사람이 의인인지 악인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법 없는 로마인들’의 법이 아닌, 정치적 선택이었습니다.

폭력을 업으로 하여 살아가는 군병들. 자신들 앞에 선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일 따위는 그들에겐 유희를 위한 농담거리에 불과 했습니다. 아무 원한도 없고, 자기들에게 아무 피해도 입힌 적이 없으며, 흉악범도, 더러운 자도 아닌 자인 예수를 그토록 잔인하게 다룬 이유는 오직 한 순간의 유희를 위한 것 말고는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도대체 예수께서 저들에게 무슨 일을 했기에, 저들은 그토록 예수를 짓밟았던 것일까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지나가는 사람들, 군중들, 심지어 십자가형에 처해진 강도들까지 예수를 비웃고 조롱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여든 십자가에서 내려와라!” “저가 다른 사람은 구원하더니,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 없도다.” 이유 없는 승리감에 들떠 ‘의로운’ 예수를 조롱하는 이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처참하게 일그러진 십작아 앞에서도 이토록 저열한 분노와 질투의 배설물을 쏟아 놓는 것일까요? 예수가 거짓된 자로 판명나면 날 수록, 예수가 우스꽝스러워지면 질수록 저들의 거짓됨과 우스꽝스러움이 가려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죄인들의 묘한 연대감 같은 것이었을까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의 이 마지막 외침을 듣고, 군병들은 그에게 신포도주를 마시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그의 고통과 갈등을 덜어주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신포도주를 마시워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놓고, 엘리야가 그를 구하러 오는지 지켜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잔인하고, 더럽고, 짐승 같은 짓을 사람이 사람에게 행하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행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군상들의 더러움과 비열함과 잔인함, 징그러운 웃음소리와 비릿한 미소, 자기들의 쾌락과 기쁨 말곤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 모습들, 타인의 뭉개짐과 무너짐에 쾌감을 느끼는 미친 웃음소리들. 이 모든 얼굴들은 그러나 바로 우리 모두의 얼굴입니다.

십자가 곁에서 하나로 겹쳐지는 얼굴들, 구경꾼들, 로마 병정들, 빌라도, 종교 지도자들, 군중들… 그들의 웃음과 그들의 쾌감과 그들의 폭력과 그들의 비열함은 바로 우리들의 마음가운데 들끓고 있는 것들을 정확하게 닮아 있습니다.  

전도되고 뒤틀린 웃음과 비웃음, 조롱과 모욕, ‘넌 아니야’라는 고개짓… 웅성거림, 폭력, 이 모든 미친 놀이판의 한 가운데서 한 음성, 한 울부짖음이 들려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이 아들이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향하여 던져지는 모든 조롱과 모욕, 폭력과 분노, 음모와 비열, 광기와 사로잡힘… 그 뒤틀리고 왜곡된 얼굴을 하고 있는 자들의 얼굴 속에서 그분은 자기의 피조물을 보았고, 자기의 자녀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이 버리신 것은 자기 아들이었고, 우리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십자가에서 아우성치는 우리들을 버리지 않고, 그의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는, 나를 버리지 않기 위해 그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살리셨고, 이 사랑이 우리를 건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