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진리(요1:1-18)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은혜(카리스)라는 말이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요한복음에는 많은 횟수는 아니지만 4번 쓰인다. 그런데 그 네번 모두가 1장에나타난다(14,16,18). 그에 반해 진리(알레테이아)라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24번이나 나타나고, 짧은 요한서신에서도 20번이나 나온다.

 

은혜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고, 진리는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살아가신 삶의 방식을 말해준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의무'나 '책임'이 아닌, '은혜' 때문이다. 은혜는 그가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을 그에게 주는 것이고, 긍휼은 그가 받아 마땅한 징벌을 그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다.

 

은혜는 창조의 근원이다. 은혜가 존재를 낳고, 은혜가 존재의 영광을 낳는다(14).

 

세상이 이러한 질서와 조화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도대체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다.

무엇인가가 존재하게 된 근원엔 '은혜'가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은혜를 받아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살아있음이 곧 은혜다.

 

때로 삶은 고통스럽고, 때로 삶은 의미 없는 지속처럼 보인다.

그런 삶을 은혜의 누림으로 살게하는 것이 바로 '진리'다.

 

진리(알레테이아)는 칠십인역에서 자주 히브리어 에메트(신실, 진실)의 번역어로 사용된다.

진리는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에 충실함, 삶에 충실함의 문제이다.

 인식과 존재와의 일치가 진리가 아니며, 명제적 사실의 진위가 진리가 아니라,

예수가 진리다. 곧 살아서 오늘을 살고 있는 자의 삶이 진리다.

진리란 살아있다는 것이 은혜임을 보여주는 삶이며, 모든 살아 있는 자가 삶을 은혜로 누리도록 살아가는 삶이다.

 

은혜의 말 한마디 내 뱉으려면, 진실과 충실함으로 오늘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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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야의 소리 (요1:19-34)

 
요한은 요단 저편의 베다니에서 세례를 베풀었다(28, cf.3:23). 이곳은 나사로의 집이 있던 베다니와는 다른 곳이다. 나사로의 베다니는 유다 땅에 있었고, 요한이 세례 베푼 베다니는 요단강 건너편에 있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유대인들이(19) 보낸 자들이 그런데 그 곳 까지 와서 요한에게 물었다. 그가 메시야인지, 아니면 엘리야인지, 그렇지 않다면 무슨 권위로 세례를 베푸는 것인지.... 요한의 대답은 자신은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다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것이다(23).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그것이 요한의 자기 정체에 대한 이해였다.

사해 문서로 유명한 쿰란 공동체는 요한이 세레를 주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대 약 4000명 이상이 쿰란 공동체가 속한 에세네파에 속했다고 하니 에세네 파는 12제자와 70문도, 이후 오순절의 120명과 부활의 증인 500여 형제들이 그 구성원이었던 그리스도인들에 비해 훨씬 큰 세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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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를 쿰란의 제자 또는 아류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넌센스다. 쿰란 공동체는 비록 광야에 있었지만, 그들의 주거지는 유대 땅에 속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 뿐 아니라 갈릴리도 주 활동 무대로 삼았지만, 에세네 파는 오직 유대 땅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해서만 살았다. 요단 건너편은 에세네파 사람들에겐 이방 땅과 마찬가지였고, 이방 땅에 사는 자들은 깨끗하지 않은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런 에세네파가 요단 건너편에서 세례를 주며 하나님 나라의 오심을 선포했던 세례요한과 관련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에세네파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당대 경건한 자들로서 필로에 의해 극찬을 받았던 에세네파 사람들이 불결하다 여겼던 요단 건너편, 그 곳이 요한의 사역 무대였다. 요단강 이편, 유대 땅에 자기 사역의 자리를 잡을 수도 있었건만 요한은 굳이 요단 건너편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을 엘리야 전승에 비추어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엘리야는 여리고를 지나, 요단 강을 건너, 요단 건너편 광야에서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엘리야가 다시 나타난다면 그곳은 다른 곳이 아닌 그가 하늘로 올라갔던 바로 그곳일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 무리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선지자도 아니라고 답한다. 그의 사역의 자리와 그의 삶의 방식(가죽옷, 메뚜기와 석청)이 명백히 엘리야와 관련이 있음에도 요한은 자신을 엘리야라 밝히지 않고, 오직 이사야가 예언한 광야의 소리라고 밝한다(사40:3). 이사야 40장은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장이다. 이곳에서 광야는 회복된 이스라엘이 돌아오는 지리적 공간이다(사40:1-2). 세례요한은 여전히 영적 유배 상태에 놓여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보며,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갔던 그곳에서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푼다. 필요한 것은 에세네파와 같은 보다 철저하고 엄격한 율법 준수와 정결 유지가 아니라, 모든 육체에게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여호와를 소망하며(사40:5), 여호와께서 다스리실 왕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사40:10).

요한 뒤에 한 사람이 올 것인데, 요한은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을 것이다(27).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33) 하나님의 아들(34)이 와서 그가 이스라엘을 회복할 것이다. 그의 대답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을 엘리야의 자리가 아닌 회복이 필요한 이스라엘의 자리에 세우고 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며 그의 오심을 대망하는 광야의 소리이다.

에세네파와 쿰란 공동체는 철저한 율법 준수와 공동체 전체에 미치는 견건을 통해 다른 유대인들과 구분되는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가 오면 타락한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어둠에 속한 이방을 멸하고, 성결함을 지켜왔던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을 모든 평범한 유대인들과 구별하였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신을 엘리야가 아닌 엘리야가 가져올 회복을 기다리는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자리에 세워놓고 오실 메시야를 기다렸다.  
 
메시야가 오시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특정한 몇몇 사람이나, 특정한 몇몇 선지자들만이 아닌 메시야께 나온 모든 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 거룩한 4천명의 무리들에 속하고자 구별된 유대 땅을 고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복이 필요한 사람, 이방 땅에서 돌아오고 있는 잃어버린바 된 자들의 무리에 속한 한 사람으로서, 요한처럼 광야에 서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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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만나다 (요 1:35-51)

 

세례요한이 예수를 만나 예수를 증언함 -> 안드레가 예수를 만남 ->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를 증언함  ->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를 예수께 데려감 -> 예수가 시몬을 게바(반석)라 부름(42). // 빌립이 예수를 만남 ->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를 증언함 ->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 데려감 -> 예수가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이라 부름(47). //  만남과 증언의 연쇄가 이어진다. 예수를 만난 자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증언한다. 그 증언의 참됨을 증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그를 예수께 데려가 그가 직접 예수를 만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하여 예수를 만난 자들은 그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오직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렇게 예수를 만난 자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믿게 되고, 믿게 된 자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증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증언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할 수 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등등... 예수를 만난 자가 자신의 증언의 참됨을 증거하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예수께 데려가 그로 직접 예수를 만나게 하는 것이다. 자기의 삶으로 예수를 증거할 필요가 물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 그러나 어떤 누구도 예수와의 직접적인 만남 없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없다. 전도는 물론 예수를 증언하는 것이지만, 전도는 전도라는 방법을 통해 누군가를 예수께로 인도하여 그로 직접 예수와 만나도록 이끄는 것일 뿐이다.

 

"와서 보라! come and see!"(39,46) - 39절에서 예수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와서 나를 보라"고 증언한다. 46절에서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서 예수를 보라!"고 증언한다. 예수를 만나, 그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 본 자가(39) 다른 누군가를 불러 "와서 예수를 보라"고 증언하는 것 - 그것이 참 이스라엘 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다. "와서 나를 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없다고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와서 예수를 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예수를 만나, 예수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보고 예수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다른 이들 또한 예수 믿는 나를 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될 것이다. "와서 그를 보라!"고 증언하는 기쁘고 확신에 찬 중매쟁이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