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고난주간 행적 중 화요일이 제일 바쁘신 듯 하다. 예수님의 말씀도 제일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여러가지 행동은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성전에 들어와서 자신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성전 장사꾼들을 쫓아낸 일이든지, 무리를 대동하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한 일이든지...
그들은 예수님께 이제 정면으로 대결하며,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여러가지 선지자적인 행동들의 근원이 무엇인지 묻는다.
     "도대체 어떤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너는 랍비의 교육도 받지 않았고, 하나님의 권세를 위임받은 우리들도 너의
      권세를 인정한 일이 없는데, 무슨 권세로 이런 선지자적인 행동들을 하느냐?"
예수님은 이들에게 오히려 질문으로 응하신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어디서 왔느냐? 세례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면 당연히 예수님의 권위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들이 당하게 될 곤란한 상황을 예상하고 모른다고 발뺌을 한다.
예수님은 자신도 모른다고 말하곤 청중들에게 두가지의 비유를 말한다. 그 비유 속에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의 기원을 설명한다. 첫번 비유(28-32)에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가식을 드러내신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대답은 쉽게 그럴듯하게 했지만, 그 말씀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고 불순종하였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들을 상징하는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싫다고 대답하였지만, 곧 회개하고 돌아가서 그 말씀에 순종한다.
두 부류의 사람들이 아버지의 말씀에 대해서 보인 반응이 내 속에도 존재한다. 나는 누구에 가까울까? 언제나 나 자신은 하나님이 책망하셨던 사람들에 가깝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목사라는 직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좀더 가까이 접하게 한다. 이것이 장점이지만, 또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듣는다. 아멘. 그리고 외친다. 그러나, 본인은 잊어버린다.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뭐, 다 그런거지...' 신학적인 여러가지 말로 변명한다. 불순종한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건성으로 듣고 흘려버린 것처럼.
다른 아들은 불순종하였으나, 그 말씀을 가슴에 담아둔다. 그리고 회개하고 돌아선다. 불순종의 자리에도 아버지의 말씀이 가슴에 뭍혀 있다. 아버지에 대한 경외함이, 미안함이, 죄송함이, 사랑이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말씀에 다 순종하지 못해도 그 분에 대한 사모함이 가슴에 있다. 이런 이들은 시간은 조금 걸릴지 모르지만, 아버지께 돌아오게 된다. 결국...
두 아들을 바라보며, 내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중과 두려움이 참으로 존재하는지 돌아본다. 아버지의 말씀이 언제나 내 속에 남아서 나를 충동하고 돌아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있는지... 늘 들었던 말이기 때문에 그저 또 다시 들린 그런 말씀으로 듣고 있지는 않은지.
두번째 비유(33-46)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속에서 주인의 아들로 등장한다. 주인은 자신의 소유를 얻는데, 많은 희생을 지불한다. 결국 아들까지 죽은 후에야 모든 것을 결산한다. 포도원 일군들은 끝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 주님은 아들로 자신의 것을 찾으러 이 땅에 오셨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아버지의 것이다. 우리는 일꾼이요, 품꾼이다. 우리가 얻는 모든 것은 아버지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바른 위치로 돌리기 위해 주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셨다. 아버지 것을 아버지에게 올바르게 돌리기 위해서...
내 속에 나를 붙들음이 얼마나 강렬한지 깨닫는다. 나의 삶은 내 것이다. 끊임없이 울려퍼지는 이 외침에 나는 굴복하고 만다. 그러하기에 내 것이 사라지면, 조금이라도 파괴되면 나는 견디지 못한다. 나의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상해지면, 말로 표현못할 분노가 솟구쳐오른다. 내가 가진 것 중에 내 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럼에도 나는 내 것을 주장한다.
구원에 대한 그릇된 이해 중 하나가 무엇인가를 더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게 말한다면, 이 땅에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죽은 이후에도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의 비유는 구원이 이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삶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것을 거부한다. 우리 것을 붙잡고 하나님께 무엇인가 더 빼앗아야 행복하다고 믿는다. 여기에 믿음의 놀라운 신비가 숨어있다. 하나님 것을 하나님께 내어줄 때, 우리는 거지가 되고 불행하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돌려드릴 때,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된다.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된다.
나는 지금 아직도 나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손에 꽉 쥐고는 울부짓는다. "하나님 왜 저에게 더 주시지 않습니까?"
본래 자기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 나의 허황된 외침은 계속될 것인가? 아마,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끝을 알 수 없는 사랑이 나의 꽉 쥔 손을 조금씩 놓게 할 것이다.
"주님, 나의 소망은 당신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