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5장 – 스스로를 구원하다 ? (삼상25:1-44)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cf.살전5:15)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 12:19)

 

사무엘상 23장~25장에서 다윗은 두 종류의 원수를 만난다. 하나는 사울이고(24:4,19),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이다. 25장에서 다윗의 원수는 나발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모욕을 스스로 갚으려 하는 다윗 자신이다(25:22,26).

 

원수란 온 힘을 기울여 누군가를 죽이고 망하게 하려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사울은 말 그대로 다윗의 원수다. 그에 반해 나발은 어리석게도 다윗의 선대함을 모욕으로 돌려주지만 그렇다고 그가 다윗을 죽이고 멸하려 하는 그의 원수는 아니다. 나발이 아닌 다윗이 오히려 누군가를 죽이고 망하게 하려는 자리에 서 있고, 이때 다윗은 마치 사울처럼 행한다.

 

사울이나 다윗에게 나름의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울에게 다윗은 자신의 왕좌를 위협하는 존재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자신의 실상을 고통스럽게 폭로하는 존재였다. 사울은 분명 다윗으로 말미암아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사울의 고통의 이유는 ‘마땅히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난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다윗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울은 자신에게서 찾아야 할 원수를 자기 밖에서 찾고는 그를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그를 죽인다고 그의 고통이 사라질까? 그렇지 않다. 그는 아마도 또 다른 다윗을 만들게(/만나게) 될 것이다.   

 

다윗은 나발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고 모욕감을 느낀다(cf.25:39). 유진 피터슨의 말처럼 “어디에서 온지도 모르는 자“라는 그의 말이 다윗의 개인적인 상처를 건드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로 인해 다윗이 나발을 죽인다면 그건 ‘이유 있는‘ 정당한 반응일까(cf.'히남'=이유없이 25:31)? 그것이 정당하다면 다윗으로 인해 모욕감을 느끼고 자신의 왕좌가 위협받는다 여기는 사울의 행위 또한 ‘이유 있는, 정당한‘ 행위가 될 것이다(cf.'히남' 19:5).

 

무수히 자신을 죽이려던 원수 사울에 대해 ‘자기 손’으로 그를 죽이지 않겠다던 다윗이(24:10), 한 번의 모욕감을 안겨준 어리석음(나발)에 대해 ‘자기 손’으로 자신의 ‘원수‘를 갚으려 한다(25:26,31,33). 본문에 3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표현인 ‘스스로 원수를 갚다‘는 말은 직역하면 ‘자기 손으로 자기를 구원한다‘는 말이다(LXX). 자기보다 강한 원수(시18:17) 사울의 손에서 벗어난 후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시18:3)라며 하나님을 찬양하던 다윗은 지금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구원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길로 다윗이 더 걸어나간다면 그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왕일 수 없다.

 

이후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정확한 타이밍에 아비가일을 보내어 다윗을 만나게 하셔서 그의 손을 붙잡아 그로 어리석은 자의 길을 가지 않게 하신다(25:32). 자기 손을 바라보고 있는 한 구원은 없다. 손을 들어 하나님의 행하심을 바라볼 때 그에게서 구원이 나옴을 보게 된다. 다윗과 사울 사이에 놓인 거리는 한걸음뿐이다.

 

이후 다윗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정확한 타이밍에 아비가일을 보내어 다윗을 만나게 하셔서 그의 손을 붙잡아 그로 어리석은 자의 길을 가지 않게 하신다(25:32). 자기 손을 바라보고 있는 한 구원은 없다(cf.삿7:2). 손을 들어 하나님의 행하심을 바라볼 때 그의 손에서 구원이 나옴을 보게 된다(사59:16). 다윗과 사울 사이에 놓인 거리는 한걸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