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장 -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롬 4:1-25)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2,3). 이신칭의라 불리는 이 교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가능케 했고 그로 인해 개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공덕을 쌓고 의의 목록을 채우고 죄의 목록을 지워 나가는 것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하나님 나라를 누린다는 것이 루터의 바울 복음에 대한 이해였다.


물론 바울은 이신칭의의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바울이 처한 상황과 루터가 처한 역사적 상황은 달랐고, 적들도 달랐으며, 제거 되어야 할 오해도 달랐다. 루터의 대적은 로마 카톨릭 교회였고, 제거 되어야 할 오해는 로마 카톨릭의 공로주의적 경건의 실천과 교리였다. 그러나 바울의 대적은 유대주의자들이었고, 제거 되어야 할 오해는 유대인의 경건의 실천과 복음의 내용 사이의 혼동이었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로 들고, 삯에 대한 비유를 통해 공로와 은혜 사이를 대조하여 믿음을 설명한다(4,5).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의로운 행위를 한 자를 의롭다 하는 의가 아니라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의에 관한 것이다(5).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는 의가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두 가지 사실을 전제한다. 첫째로 사람들은 스스로의 공로와 행위로 의를 얻을 수 있는 상태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 곧 불경건과 불의가 사람들의 현실이라는 것이며(5,7), 둘째로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통해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여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할 수 있는 근거를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24,25).


이 두 사실을 통해서 확인되는 것은 복음을 통해 사람에겐 원인이 없는 결과가 허락되었다는 것이다(4,5). 불경건한 자가 죄 없다 여겨질 방법이 없는데 그런 자가 죄 없다 여겨질 뿐 아니라 나아가 의롭다 여겨진다면, 그것은 불경건한 자에게서 비롯될 수 없는 무언가가 그에게 일어난 것이다. 자기에게 원인이 없는 결과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경우 그들이 의롭다 인정받은 근거는 그들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었다. 아브라함과 다윗 쪽에서 내놓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 곧 믿음이었다.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약속하신 일을 하나님께서 능히 이루실 줄을 믿었고(3,13,17,19,20), 다윗은 범죄한 자로서 자기의 죄와 악을 하나님께 고백했고 그에게서 오는 용서를 경험했다(6,7,8).


‘행위가 아닌 믿음‘이란 말은, 따라서 의의 근거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뜻한다(2,5). 그러나 이 말이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선을 행하거나 의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로 가게 되면 신발을 머리에 쓰는 격이 된다. 바울은 행위와 믿음을 “행함과 무위“의 대조가 아닌 “율법의 행위“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대조로 이끌어간다(9ff,13ff).


바울이 거부하고 있는 행위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의 행위들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을 특징짓는 규정들인 할례와 안식일과 음식 등의 정결규례다. 그런 규례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을 특징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생각에 따르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할례를 받아야 했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생활 방식이 되어 버린 정결 규례와 안식일 음식 규정 등을 다 지키고 따른다는 뜻이었다(갈5:3). 당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회당을 중심으로 많이 있었으나, 할례를 행하고 유대인이 되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바울은 이후 집요하게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았던 때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이었음을 논한다(9-12). 그를 통해 할례, 곧 유대인 됨이 의의 조건이 아님을 증거한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인정하던 내용이었다(롬3:26,30;갈2:16).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 사실을 강조해야 했던 것은 최초의 기독교인들이 다름 아닌 유대인들이었고, 그들에게 있어 유대인 됨과 그리스도인 됨은 서로 쉽게 분리되지 않는 성격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들은 유대의 절기를 지켰고, 할례를 행했고, 음식 규정을 지켰다. 왜냐하면 그들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들은 공로를 쌓는 방편이 아닌, 그들의 삶의 조건과 환경이었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상황이 문제를 낳았던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수를 믿는 것뿐 아니라 할례로 대표되는 유대인의 생활 방식 또한 요구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유대적 삶의 방식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나, 삶의 방식이 되어 버린 율법을 따라 사는 삶을 포기할 이유가 없었던 유대인들은(16) 예수에 대한 신앙과 더불어 유대적 삶의 방식 또한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경우 그들의 삶의 방식은 이방 문화권 속에서의 관례와 관습이었다. 그런 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고 또 받아들일 이유도 없는 주장이었다(16).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들을 하고, 할례를 하고, 유대인이 되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낸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사랑을 믿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을 통해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24).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유대인의 표지가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의 행위들이라면,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13).


바울의 대적은 공로주의 유대교가 아닌 민족주의 유대교였고, 제거되어야 할 오해는 공로와 행위를 통한 구원 가능성이 아닌 복음과 유대인 됨을 구분하지 못하는 혼동이었다. 예수를 믿고도 선행이나 고행 등의 행위를 통해 구원에 보탬을 주거나 구원을 확실하게 할 수 있다는 공덕주의가 바울이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할례를 행하고 율법의 규정을 따라 유대인이 되어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라는 구약과 신약의 시대적 중첩이 바울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아브라함은 할례 받기 이전, 율법의 요구가 나타나기 이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을 따라 삶을 살았고 그로 인해 의롭다 함을 받고, ‘세상의 상속자‘로 세워졌다(13). 물론 그는 이후 할례를 받았으나, 할례는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확증일 뿐 할례와 율법 준수를 통해 의가 온 것이 아니었다. 이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할례자와 무할례자 모두의 조상이 되었지만, 세상의 상속자가 된다는 약속은 율법이나 할례를 준수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12).


꼭 집고 넘어가야 할 믿음의 특징이 하나 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단순히 어떤 사건이나 사실에 대한 확인이 아니며, 한 순간 갖고 있는 어떤 신념이 아니라, 75세 하나님의 부름을 따라 하란을 떠나 창세기 15장을 지나 16장 이스마엘을 낳고 17장 할례를 행하고 21장 이삭을 낳기까지의 전 과정을 포괄하고 있는 믿음이란 사실이다(19). 15장에서 의롭다 여겨졌던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뿐 아니라, 백 살이 되어서도 약해지지 않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도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고 말하므로(22) 바울은 믿음을 수학 공식이나 자판기 같은 무 인격적인 원리가 아닌 하나님과의 사귐과 동행, 신뢰, 관계를 포괄하는 평생의 삶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믿음은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 구해주기를 바라며 울고 있는 숲 속의 길 잃은 공주의 기다림‘이 아니라, 길 잃은 자를 찾아와 평생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그를 신뢰하며 그와 동행하고 그의 뜻을 따라 순종할 뿐 아니라 그의 소망에 함께 참여하는 ‘세상의 상속자‘로 살아가는 평생의 삶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해 가능했던 나의 40년이었기에 내 앞에 놓여진 40년이 더욱 기대 된다. 나는 비롯 때로 비겁하고(창12장), 때로 믿음이 약해지고(창16장), 때로 반복되는 실수를 범할지 몰라도(창20장), 약속하신 모든 것을 능히 이루실 하나님을(창21장) 나는 믿는다. 그의 신실함이 그에 대한 나의 신실함을 낳고, 예수의 죽기까지의 순종이 나의 죽기까지의 순종을 낳을 것이다(창22장). 아브라함, 그는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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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장 1절-25절 (사역)


1. 그러므로 육신으로 우리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발견한 것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2. 왜냐하면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들에 의해 의롭게 되었다면, 그는 자랑할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3. 왜냐하면 성경이 무엇을 말합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4. 일을 하는 자에게 삯은 은혜가 아닌 마땅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5. 그러나 일을 하지 않지만 (믿는 자, 곧)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집니다. 6. 하나님이 행위들과 상관 없이 의롭다 여기시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 다윗도 그와 같이 말합니다. 7. “복되도다, 그들의 불법들이 용서받고 그들의 죄들이 덮어진 자들은. 8. 복되도다, 주께서 죄를 그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9. 그러므로 이러한 ...복의 선언은 할례자에게 주어진 것입니까 아니면 무할례자에게 주어진 것입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10. 그러므로 어떻게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것입니까? 할례자로 있는 그에게 입니까 아니면 무할례자로 있는 그에게 입니까? 할례자로 있는 그에게가 아닌 무할례자로 있는 그에게 입니다. 11. 할례라는 표시는 그가 무할례자로 있을 때에 가졌던 믿음의 의에 대한 확증으로서 그가 받았던 것입니다. 이는 그가 무할례자로 있음을 통해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기 위함이며, (무할례자들인) 그들 또한 (그들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2. 그는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기도 합니다만 할례 받은 자들에게만 그가 조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자로 있을 때에 가졌던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는 조상입니다.


13. 왜냐하면 아브라함이나 그의 자손에게 ‘그가 세상의 상속자가 된다‘는 약속이 주어진 것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닌 오직 믿음의 의를 통해서였기 때문입니다. 14. 왜냐하면 만일 율법을 따라 사는 자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헛것이 되었다는 것이며, 약속은 폐지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5. 왜냐하면 율법은 진노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는 것입니다. 16. 이렇기 때문에 (상속자가 되는 일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는 은혜를 따라 모든 자손에게, 곧 율법을 따라 사는 자만이 아닌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사는 자에게도 약속이 확고하게 되기 위함이니,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래서 “많은 민족들의 조상으로 내가 너를 세웠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가 믿었던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있는 것들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18. 그는 소망을 가질 수 없을 때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너의 씨가 이와 같이 될 것이다“ 말씀하신 대로 자신이 많은 민족들의 조상이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19. 그는 믿음이 약해져서 거의 백 살 된 이미 죽은 자신의 몸과 사라의 태의 죽음에 집중하지 않고 20.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집중하였으며 그리하여), 믿지 못함으로 마음이 갈라지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강건하여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21. 이는 약속하신 분이 또한 능히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22. 그렇기에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고 기록된 것은 다만 그를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24. (그것은) 또한 우리를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을 믿는 우리들에게도 (그 믿음이 의로) 여겨질 것입니다. 25. 그분은 우리의 범죄들 때문에 (죽음에) 넘겨졌고, 우리의 의롭다함을 위해 일으켜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