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1이삭, 이스마엘, 하갈, 사라 그리고 하나님 ( 21:1-21)


 

1. 하나님께서 사라를돌보셨고말씀하신 대로 행하셨다(1).


‘돌보다‘(파카드,에피스켑토마이)라는 단어는방문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주목하여 보고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돌보는 것이라면 돌봄의 첫 번째는 방문하는 것, 찾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라를 방문하여 그녀를 돌보셨다(1). 방문은 때로 돌봄이 아닌 위기와 갈등을 낳기도 한다. 하나님은 벌써 여러 번 사라를 방문하여 그녀에게 약속을 주셨고, 약속하신 대로 행하셨다. 9월 한 달간 성도들의 집을 방문한다. 방문이 돌봄과 위로가 되기도 하고, 위기와 갈등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방문으로 사라가 웃고 그녀와 함께 한 모든 자들이 웃듯(6) 우리의 방문도 그렇게 기쁨의 만남이 되길 기도한다.

 

2. 나의 기쁨, 너의 기쁨


 이삭이 젖을 떼고 큰 잔치를 한다. 기쁨과 웃음이 넘쳐난다. 그런데 잔치 중에 사라의 마음은 기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스마엘이 웃으며 노는 것을 본 사라의 마음은 불편하다(9). – 우리성경이나 여러 영어 역본이 칠십인역을 따라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렸다는 형태로 번역하지만, 히브리 성서는 이스마엘이 노는 것을 사라가 보았다는 정도로만 표현된다. 이후 사라의 행동을 이해할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하지 못할 짓을 했다고 보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본문에 집어 넣어 읽는 것이다.

 

이삭이 젖을 떼고 잔치를 한 때가 언제인지 특정할 수 없지만 최소 2살 이후였을 것이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나이 차가 14살이니 이스마엘은 이 때 이미 최소 만 16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 장성한 이스마엘과 어린 이삭을 보면서 사라는기업을 잇는데 까지 마음이 이어져서 이스마엘과 하갈을 쫓아내고자 한다.

 

사실 당대 풍습에 따르면 이스마엘은 하갈이 아닌 사라의 아들이다. 그런데 사라는 이삭이 태어난 마당에 이스마엘을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여 그에게 장자의 몫을 줄 수가 없다. 하갈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갈등 또한 여전히 사라의 마음에 앙금으로 남았을 것이다. 사라의 눈에 이스마엘은 어디까지나 애굽 여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아 준 아들이지 자기 아들은 아니다(9).

 

사라의 요구에 아브라함은 괴로워한다. 그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도 사라를 편들어 이스마엘을 내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한편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네 씨라 불릴 것이라 확인해 주시며(12) 또 한편 이스마엘도너의 씨니 하나님이 그를 돌보아 주실 것이라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에게 아무런 분깃도 나눠 줌 없이 떡과 물 한 가죽부대만을 지워주고 광야로 내 보낸다(14). 이후 아브라함이 후처인 그두라에게서 얻은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눠주어 동쪽 땅으로 가게 한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로 보인다(25:6). 물론 그두라는 후처이고, 하갈은 첩이다. 그러나 근동의 함무라비 법전만해도 첩의 자녀에게 가혹하게 하지 말 것을 명하는 마당에 사라(와 아브라함)의 행위는 지나쳐 보인다.


자신의 잔치 자리에 마음에 고통을 주는 누군가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사라는 같이 기뻐할(차하크) 수 없었고, 이스마엘이 웃으며 즐거워하는 모습(메차헤크)에 오히려 마음속의 고통이 되살아 난다. 나의 기쁨이 너의 기쁨이 되고,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는 일은 이삭(웃음,기쁨)의 젖떼는 잔치 자리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말하자면 내쫓김을 당하여 광야에서 방황한다(14). 그 때 하나님이 이스마엘의 울음 소리를 들으시고(‘이스마엘’=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다) 그를 도와주신다. 하나님이 이스마엘과 '함께 계셔서' 그가 장성하게 되고(20) 그는 약속대로 열두 족속을 이루게 된다(25:16).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은 이 사건을 알레고리로 풀어내며 하나님의 기이하신 행하심을 보여준다.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의 예루살렘이다(25). 여종 하갈의 자손은 다름아닌 스스로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이라 자부하고 있는 유대 사람들이다(25). 자유자 사라의 자손은 할례가 아닌 약속을 따라 나온 자들로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된 이방 사람들이다(28).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이후 제일 먼저 간 곳이 예루살렘이 아닌 아라비아였다고 한다(1:17). 아라비아는 전통적으로 이스마엘의 후손들인 미디안 인들이 사는 곳이다. 바울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에게 말하자면 제일 먼저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복음의 역사 속에서 하갈과 사라의 육신적 후손의 운명은 이렇게 뒤바뀐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러나 이렇게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뒤바꾸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갈라디아서 이후 쓰여졌을 로마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씨를 버리지 않았다고 말한다(11:1).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인 이스마엘과 이삭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 것이다(11:32).


나의 웃음이 너의 웃음이 되고, 너의 웃음이 나의 웃음이 되어야 하는데, 인간사는 그렇지 만은 않아서 누군가의 웃음이 나의 고통이 되기도 하고, 나의 웃음이 누군가에게 고통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과도 함께 계시며(20), 그의 울음 소리를 들어 주시고(17), 이삭과도 함께 계시며(26:28) 그의 웃음소리도 들어 주셔서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안에서 모두를 웃게 하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