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장 - 받고 있는 것, 주고 있는 것 (눅 6:27-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38)

-> 대개 이 말씀은 ‘우리가 작게라도 이웃과 하나님께 내어주면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되갚아 주신다’는 형태로 이해된다.

부흥회적 문맥 속에서 이는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은 더 큰 손으로 꽉꽉 눌러 되갚아주신다’는 형태로 사용되곤 했다.

 

그러나 본문에서 되갚아 주는 주체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이다. ...
 

본문은 “네가 주면, 그들도 너에게 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네가 남에게 받고 있는 것은, 네가 남에게 주었던 것이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네가 남에게 받고 있는 대접 속에서 너 자신이 남들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네가 셋을 주면, 하나님이 삼백으로 돌려준다’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아 정죄와 비판이 아닌(37) 자비와 용서로 남들을 대접하고 살라’는 말이다(36).


우리가 주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 아닌 미움과 원망과 분노로 얽히고설켜있는 가까운 이웃들이다.

가족이고 직장동료이고 교회 식구들이다.

누군가가 내게 자비와 사랑이 아닌 원망과 미움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다름 아닌 내가 그들에게 원망과 미움으로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다(38).

 

내가 준다고 그들도 내게 돌려줄까? 에이… 설마…?... 주께서 말씀하신다.

'그들이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에게 안겨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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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의 인도자 (눅 6:39-49)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같이 구덩이에 빠진다(39). 제자와 스승이 모두 맹인이면, 제자가 스승처럼 된다 해도 그는 맹인이다. 사람은 자기 안에 대들보가 있어서 자신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42). 그러니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맹인이다.

 

사람 안에 들어있다는 대들보는 아마도 자기중심성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실재에 대한 해석은 자기중심성이라는 필터를 통과하여 이루어진다. 그러한 해석을 덮기 위해 동원되는 손쉽고도 강력한 수단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뜻'이다. 말이 하나님의 뜻이지, 그 뜻을 통해 정당화되고 있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다. 자신의 선택, 자신의 결정, 자신의 상황, 자신의 욕망이 어느새 하나님의 뜻이라는 프리즘을 거쳐 무지개 빛으로 영롱하게 빛나고 나서야 해석의 과정은 끝이 난다.

 

하나님의 뜻으로도 자신을 정당화하는 자기 중심성의 구덩이에 빠져있는, 자기에게로 굽어져있는 자에게 밝히 볼 소망이 있을까? 있다면 오직 하나 주님에게서 듣는 것이다(48). 주님에게서 들을뿐 아니라 듣고 이해한 대로 행하는 것이다(48). 듣고 행하는 과정 속에서 삶의 진정한 주추가 발견될 것이고 그리하여 세워지는 집은 누군가와 함께 살 수 있는 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