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 쓴 작은 두루마리(계10:1-11:19)

 

여섯번째 나팔과 일곱번째 나팔 사이에 10장과 11장이 놓여있다. 여섯번째 봉인과 일곱번째 봉인 사이에 큰 환란에서 나온 십 사만 사천 성도가 어린양의 보좌 앞에 선 것처럼, 여섯번째 나팔과 일곱번째 나팔 사이에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한 하나님의 종들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일곱번째 나팔이 울려나고, 땅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치가 선포된다(11:15). 앞선 일곱개의 봉인이 환란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과 그들의 구원을 위해 죽임당한 어린양의 모습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일곱 나팔은 온 땅에 대한 메시야의 완전한 주권에 초점이 놓여 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11:15)

 

메시야의 온전한 왕권이 선포되기 전, 그러나 반드시 먼저 일어나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은 온 땅을 향한 복음의 선포이다(10:7, cf 11:7a). 11장에서 복음은 모세와 엘리야로 대표되는 두 증인에 의해 능력있게 선포된다(11:6). 이들은 3년 반동안 =42개월(2)=1260일(3)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를 증언했고, 그들의 증언이 마쳐졌을 때(11:7), 그들은 예수님처럼 죽임을 당하게 된다(11:8).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선포했던 복음처럼 삼 일 반 후에 살아나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11:11). 메시야의 증인들의 선포가 원수들의 방해 가운데서도 이 땅에 온전히 선포됨은, 온 땅에 대한 메시야 통치의 전제 조건이기도 하며 그 통치의 증거이기도 하다. 메시야는 비단 그를 믿는 자들만의 통치자가 아닌, 땅의 모든 나라의 참된 통치자이다. 세상에 대한 메시야의 왕권은 그런데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복음의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이 땅에 현실화 된다(10:7).

 

여섯번째 나팔과 일곱번째 나팔 사이, 요한은 한 힘있는 천사의 손에서 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먹는다(10:10). 그 맛이 입에서는 꿀처럼 달았지만 먹은 후 배에서는 쓰고 썼다(10:9-10). 작은 두루마리에 쓰여있는 내용은 '복음'이었을 것이다(10:7). 메시야의 통치는 힘과 세력으로 이 땅에 오지 않고, 오직 복음의 증언과 선포를 통해 이 땅에 임한다.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다. 꿀 같이 단 말씀이다. 그러나 복음을 살아내는 것, 복음의 증인으로 사는 것, 복음 안에서 이 땅을 향한 메시야의 통치를 구현하는 것은 쓰디 쓴 일이다. 내 몸과 내 삶 가운데 쓰게 베어나오는 복음의 증언은 그러나 다른 누군가의 입에 꿀 같이 달콤한 '기쁨의 소식'이 될 것이다. 예수를 믿고 사는 삶은 바울의 삶이 보여주듯 풍부와 가난, 높음과 비천, 유명과 무명 사이를 통과하는 삶이다. 달지만도 않지만, 그렇다고 쓰지만도 않은 삶이다. 때로 고단하고, 때로 병들어도(지난 4일, 내 몸은 그야말로 좋지 않았다. 예배와 제자훈련, 교육부 모임때만  멀쩡했다^^.), 펼쳐들 말씀이 내게 있고, 말씀은 내게 쓴 현실 속에서도 단 꿈을 꾸게 한다. 이 복잡 미묘함이 "감사하다."(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