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2장 – 발람의 길 (민 22:1-35)

 

[20] 그 날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오셔서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으니, 너는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거라. 그러나 내가 너에게 하는 말만 하도록 하여라." [21] 발람은 아침에 일어나 자기 나귀에 안장을 얹고, 모압 고관들을 따라서 길을 나섰다. [22] 그러나 그가 길을 나서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크게 노하셨다. 주님의 천사가 그의 대적자가 되어서, 길에 서서 가로막았다... (민 22:20-22)

 

‘너는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라’(20) – 하나님의 허락의 말씀을 듣고 발람은 모압 고관들을 따라서 길을 나선다. 그런데 이렇게 길을 나서는 발람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크게 분노하셔서 주의 천사를 발람의 대적자로 보낸다(22). ‘일어나 함께 가라’고 허락하실 때는 언제고, 하룻밤 사이에 마음이 변하셨는지, 하나님은 아침 일찍 길을 떠나는 발람을 죽이려 한다(33). 도대체 이게 무슨 변덕이란 말인가?

 

그러나 변덕스러운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재물과 권세에 흔들린 것은 다름아닌 발람이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에 대해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백성이니 그들을 저주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두 번째 자신을 찾아온 모압의 고위층들의 제안을 분명하게 거절하지 않는다(19). 비록 그는 ‘하나님이 하라고 주시는 말 이외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 마음 속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모압 왕의 제안이 자리잡고 자라고 있다(신23:5).

 

칼빈은 로마서 7장 주석에서 ‘인간의 육신은 하나님의 법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경향성을 갖고 있는데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마주쳤을 때에 비로소 드러난다’고 말한다. 발람은 입을 열기만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행할 것’이라 말한다(8,18).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이 주어지자(이스라엘은 복을 받은 백성들이다) 그가 주의 말씀보다 모압 왕의 제안에(부와 명예에) 더욱 사로잡혀 있는 사람임이 드러난다(19). ‘그들과 함께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발람의 모습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21,22).

 

눈이 어두워졌음에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문을 찾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창19:11), 발람도 욕망에 눈이 멀어 있다(31). 천사가 그의 대적이 되어 그를 죽이고자 함에도, 그는 가던 걸음을 돌이키지 못하고, 돈을 받고 마침내 이스라엘을 유혹하는 자리에 서고야 만다(민31:16). 한번 품어졌던 마음이 마침내 그 마음의 주인을 파멸로 이끌고야 끝이 난다.

 

스스로 돌이킬 수 있을까? 눈이 열려 칼을 빼어 든 천사의 모습을 보고 나면 스스로 돌이켜 주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두 번 세 번 엄중한 경고를 받으면 스스로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만 따를 수 있을까?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면 하나님 앞에 경성하여 그 잘못을 스스로 바로잡을 수 있을까? 솔로몬이나(왕상11:9) 엘리가(삼상3:13) 걸어갔던 길과 다른 길을 어떻게 하면 걸어갈 수 있을까?

 

사울의 분노가 아닌 요나단의 사랑은 어떻게 하면 마음에 품어질까?

 

욕심, 탐욕, 위반에의 욕망, 잘못된 길을 걸어 본 경험, 그 경험이 만들어내는 관성, 근시안, 자기 중심성…. – 사람 안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죄 그 자체와 싸우는 것으로는 패배를 지연시키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고 이해하고 동의하고 걸어보고 겪어보고 알아가고 소중히 생각하며 나아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는 것은 주의 은혜가 아니면 누려볼 수 없다.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한다(신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