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25)

2012-09-01 토요일

히스기야가 다스리기 시작하던 715년경, 애굽은 피앙키의 뒤를 이은 구스의 샤바카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다. 728년에 이미 구스의 피앙키가 애굽의 멤피스를 점령하여, 자신의 영향력 아래 놓고는 그곳에서 물러갔으나, 그를 뒤이은 그의 형제 샤바카는 아예 애굽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당시 애굽은 내적으로 갈라져 내분이 진행되고 있었다(2). 내적인 갈등으로 인한 분열이 일어나고, 외부의 적 구스가 애굽의 심장이랄 수 있는 멤피스를 통제하고, 나아가 나일의 물이 범람치 않고 말라 버리는 일까지 겹쳤으니(6), 애굽은 그야말로 공황상태다. 농부(7), 어부(8), 수공업자(9) 할 것 없이 근심과 슬픔 중에 있다. 심지어 유다 땅이 대제국 애굽의 두려움이 될 만큼 그들은 쇠약해질 것이다(17). 안으로 갈라진 것 만큼 무서운 적은 없다(2). 그런데 이사야에 따르면 이 모든 일들이 여호와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14)! 도대체 무엇을 위해?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여호와를 섬기는 다섯 성읍이 애굽 땅에 있게 될 것이다(18). 애굽의 다섯 도시에 유다의 콜로니가 설 것이다. 그 성읍은 마치 애굽 땅의 도피성과 같아서, 압박 받는 자의 피난처가 될 것이고, 여호와는 그들의 보호자가 될 것이다(20). 애굽의 쇠약해짐은 오히려 그들에게 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22).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주시리라“(22)

 

그러한 미래를 내다보며 이사야는 꿈꾼다. 감히 이전 그 어떤 선지자도 꿔보지 못한 꿈이다.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함께 여호와를 경배하며(23-25), 이 셋이 세계 중의 복이 되는 꿈이다(24). 이사야는 어떻게 이전의 누구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이런 전망을 내 놓을 수 있었을까? 애굽의 쇠약해짐과 그로 인해 일어날 결과를 내다보며, 이사야는 그 속에서 여호와의 일하심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일까? 만일 그 곳에 서게 될 유다 성읍들로 인해 애굽이 여호와를 경외할 수 있다면, 여호와의 심판의 막대기로 사용되는 앗수르 또한 유다로 인해 여호와 경외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히스기야의 등장이 이사야로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서 유다가 감당할 역할에 대한 꿈 꾸기를 가능하게 했을까?

 

이사야가 이런 꿈을 꿀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들 또한 같은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작은 땅 유다로 인해 애굽과 앗수르 두 나라가 여호와 경외를 배울 수 있다면, 작은 교회 또한 열국을 향한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애굽도 앗수르도 키를 쥐고 있지 않다. 애굽이나 앗수르가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미래를 열수 있는 키는 유다가 쥐고 있다(24). 쇠약함이나 강성함도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는 키는 하나님을 경외함이다(21,23).

 

이사야의 예언은 히스기야 때 이루어질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히스기야는 아하스의 노선을 떠나 반 앗수르 전선에 선다. 애굽과 손을 잡고, 앗수르를 대적하는 정책을 편다. 이사야의 예언은, 종교적으로는 비록 훌륭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지혜로웠다 할 수 없는 히스기야 시대 그 너머에 아직 그 성취를 남겨두고 있다. 그러나 그 날은 올 것이다. 이전의 그 어떤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꿈, 그 꿈꿈만으로도 이사야는 이미 예수의 복음 한 가운데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