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다음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이었다. 성경은 안식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하지 않는다. 단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질 것을 우려한 종교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경비병을 세워줄 것을 요청한 사건만 기록하고 있다.
이 때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었는가? 제자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제자들은 두려움 가운데 다락방에 숨어있었다. 절망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 바로 전까지 일말의 희망을 가졌는지 모른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라도 무엇인가 능력을 행사하지 않으실까? 하나님이 무엇인가 놀랄만한 이벤트를 준비하시고 그것을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터뜨리지 않으실까?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님은 무력하게 죽으셨다. 그리고, 그 이후 하루가 지났다. 예수님의 시신은 무덤에 묻혀 있다.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도 없다.
침묵이 하루를 지배한다. 제자들이 경험한 안식일 중 가장 긴 안식일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예수님이 죽으셨다. 하나님은 아무런 일도,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침묵에 부딪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나님의 임재가 사라진 듯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절망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나님께 아무리 외쳐도 하나님의 응답은 없고.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고, 심지어 하나님의 확실한 비전도 빛을 잃고 사라진 듯하게 느껴진다.
나는 한국에서 굉장히 스스로 믿음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곳에 와 보니 얼마나 믿음이 없는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언어와 미래를 알 수 없는 유학 생활. 내 앞에 놓여있는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이 무엇인가 표징을 주시면 좋으련만,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는 것 같기만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내 가슴에 약속과 비전을 주셨다. 그러나, 현실 속에 있는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의 현실과 대치되는 듯한 그 말씀에 '아멘'할 수 없었다. 그것이 내 믿음의 현주소였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느낄 수 있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 느껴지지 않는것,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 것, 그것을 신뢰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믿음'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이해도 신뢰도 턱도 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 속에서 외치는 나의 부르짖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았다. 더 이상 재론할 여지도 없는 듯이 가치도 없는 물음에는 침묵하시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나에게 '믿음'을 요구하셨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 느껴지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는 '믿음', 아버지 하나님으로서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 그 믿음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미소짓는 것 같았다.
예수님의 죽으심 다음 날, 침묵만이 온 세상에 가득했다. 모든 상황은 종료된 듯 했다. 사탄이 승리한 것 같았다. 아마, 사탄의 왕국에서는 거대한 축하 잔치가 있었을 듯... 종교지도자들이 승리한 것 같았다. 그들의 기득권은 안전하게 보존되었다. 제자들은 이제 더 이상 소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처럼 보이는 이 가운데, '믿음'을 요구하시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이루어가고 계셨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히11:6)
Am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