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절정에 이 외침을 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어린아이처럼 완전히 맡기고 숨지셨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이 일을 위해 당신의 삶을 조절하시면서,  결국에는 예루살렘에 오르셨다.
주님은 우리의 버림받음과 죽음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을 받으셨다.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사건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스스로 피조물을 위해 저주를 받는 몸이 되시다니...
이 신비는 결코 우리의 작은 머리로는 티끌 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터지는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십자가 위에는 하나님의 지엄하신 '공의'와 하나님의 끝을 알 수 없는 '사랑'이 동시에 걸려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 던지고, 외면하면서 까지 '공의'라는 한 단어를 이루어야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엄한 공의는 인간에게 절망이라는 단어를 가져다 준다. 그 누구도 공의를 이루지 못하기에... 하나님은 공의를 사랑으로 덮으셨다. 당신을 죽음에 내어줌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림으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랑으로 공의를 넘어 인간에게 영원한 삶을 주셨다.
이 사랑이 우리로 공의를 실천하게 만든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였다.
하나님은 공의를 실천하는 출발점을 '형벌'에서 찾지 않으시고, '사랑'에서 찾으셨다.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하는 자는 '의'를 이루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된 자는 '의'를 이룬다. 가슴이 터질듯한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한 자는 삶의 모든 것이 그 사랑하는 분을 향해서 바뀌게 된다. 결코 완전할 수는 없지만, 그 사랑이 언제나 가슴에 남아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니...." -richtig! 계명을 지키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사랑을 알았기에 벅차오르는 감격으로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분이 사랑이 어떠한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리 삶의 죄가 얼마나 흉악한지 깨닫게 된다. 우리의 눈에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맺혀 있어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에게 '공의'와 '사랑'의 완전한 조화를 가져다 준다.
나 자신에게 항상 던지는 질문이면서, 또한 간구하는 기도제목이기도 한 것이 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가? 하나님 사랑의 길이와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알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인 삶의 출발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에 있다. 사랑은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열어준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세상에 매여서 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복만 달라고 아우성칠 수 밖에 없다. 왜 나를 돌봐주지 않으시냐고 불평할 수 밖에 없다.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을 알게 될 때, 도저히 이해되지 않던 바울의 권면이 가능해진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고난주간의 묵상을 시작으로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언제나 함께 하게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