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 첫 날 저녁은 양을 잡아 먹는 날이다. 예수님은 지금 베다니 문둥이 시몬에 집에 있고, 제자들은 어디에서 예수님이 유월절을 보낼까 고민하여서 묻는다. 예수님의 예루사렘 행은 그야 말로 센세이션이였다. 제자들과 사람들은 환호를 받으면 나귀를 타고 입성해고, 성전에 상인들을 뒤업고,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고, 저녁이면 예루살렘에 계시지  않았다.

유절절 양은 예루살렘에서 먹어야 한다. 순례객들은 미리와서 방을 잡고 예약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성전제사를 둘러 싼 귀족들에게 지목된 이후에는 아무라도 쉽게 방을 내 주지 않으려 했음에 틀림이 없다. 예수님의 인간관계가 성경에 소개된 것 보다 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나 예수님이 보낸 두 제자가 만난 사람은 이름이 확실치 않다. 성내에서 물동이를 이고가는 사람이 어디로 가든지, 그리로 들어가 주인에게 선생님을 위한 방을 문의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임의의 사람, 임의 방, 임의의 시간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보낸 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마자, 물동이 이는 사람을 만났고, 그 집에서 유월절을 예비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대사만 긴 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이 구절 속에, 예수님의 미리보심(Vorsehung)를 느낀다.
성전을 청결게하고 목자없는 양같이 흩어진 양무리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시고, 저녁이면 예루살렘 밖에 거쳐에서 주무셨던 예수님.... 이런 한 인간으로서 예수가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만 가지고 있는 사람의 중심을 보고, 일의 경과를 미리 내다 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단지 사회의 건전한 도덕이나 윤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도 아니다. 부패한 사회를 바로잡는 사회 정화운동을 하는 분도 아니다. 불쌍한 사람을 도우면 돕는 자선가도 아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삶이 매력을 느끼고, 많은 사람들이 그와같이 살기를 원하지만, 빠진 것이 있다.
예수님 역시, 전지 하신분이고,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복음서는 말해주고 있다. 그분을 믿고 따르라고 복음서는 내 안에서 부터 설득하고, 조그마한 실뢰로 그분을 믿게 한다.

그 분만에 참으로 보신다. 그분만이 내 인생을 계획하고 준비한다는 사실에 순종한다.


- 어제는 나에게 많은 뒤틀린 날이었다. 한학기에 Schwerpunkt로 삼았던 것이 엉클어졌다. 마친 한해 농사지을 농부가 갈지않고 거름이 없는 밭을 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에 다시 알아봐야 학한기 살림을 제대로 살것 같다.  내가 마음 먹은 것이 막히면 막히는데로, 열리면 열리는 데로 주님의 보이시는 것 만큼, 열어주시는 만큼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