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6장은 마태복음의 큰 단락을 나누고 시작하는 전형적인 문구인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로 시작됩니다.
새로운 단락, 새로운 국면이 시작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시작의 자리에서 우리는 어쩌면 하나의 사건일 수도 있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전혀 다른 시각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길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고 합니다.

한쪽에는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고 부정하고 흔들고 들어오는,
그러나 많은 '무지한 군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생각되어 함부로 할 수도 없는,
한 무지한 '시골 촌놈'을 죽이기 위한 당국자들의 음모가 있었고,

한쪽에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다가오는 십자가의 때를 기다리며, 마음을 다잡고 있는 예수님의 준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왜 이땅에 왔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이 하시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하나님이 이 일을 진행시키고 계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삶은 흔들림 없이 십자가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배신'에 의해 '팔리워지고', '음모'에 의해 '억욱함'을 당하고
군중들의 이해할 수 없는 변덕에 '찬탄'이 '조롱'으로 바뀔지라도
그분은 자신이 가야할 길이 무엇이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너무나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 길에, 그 방향에 스스로 동의하셨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당국자들, '길 안내'라 불리는 '토라(오경 또는 성경)'에 정통하고
토라를 따라 사는 방법을 가르치던 그들은 자신들이 도대체 왜 이땅에 와 있고
어디로 향해 자신들의 삶을 집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삶을 지켜내야 한다'고...
사상과 주장하는 종교적 내용은 달라 보였지만
그들 모두를 모으고 있는 공통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뿌리부터 부정하고, 폭로하며 들어오고 있는 예수를 제거하는 것...

우리는 어디를 향해 우리 삶의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 도대체 삶을 기울이고 있는 방향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요?
그 방향이라는 것이, 십자가와 일치하는 방향일까요?

아브라함이 땅의 모든 족속이 자신을 통해 복을 받는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듯
우리 모두도 그렇게 땅의 모든 족속이 우리를 통해 복을 받는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그 부름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동일한 부름이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의 부르심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이루기위한 하나님의 유일한 승인이 있는 부름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지 않은 동안은 어쩌면 십자가를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는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우리 눈을 열어 우리를 향한 당신의 부르심을 알게 하시고,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길을 걷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