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다니엘 2장 – 오늘이라는 신비 (단 2:1-49)
신비란 말해주지 않아 모르는 비밀이 아니라, 말해줘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사실에 대한 것이다(18,19,27,28,29,30,47(2)). 신비란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닌 ‘보고 아는 것’이다. 욥은 하나님과의 대면 이후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욥42:5)라고 말한다. 전에 그는 자신이 가진 ‘정의의 논리’를 따라 ‘하나님을 이해한다’ 여겼다. 그러나 까닭 없는 고난 앞에서 속수무책인 지금, 하나님과 대면한 이후, 그는 눈 앞에 놓여 있는 오늘이라는 ‘신비’ 앞에 선다.
이토록 질서 정연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보다 도대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비다. 모든 이해와 납득을 넘어, 눈 앞에 놓여 있는 지금, 오늘, 세상, 삶, 나 그리고 너 – 그것이 신비다.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고, 때로 항복할 수 없으며, 받아들일 수도 없는 오늘이, 나의 이해와 상관없이, 오롯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이러한 현존은 그 자체로 공포와 불안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1). 그러나 신비로서의 오늘은 하나님을 마주치게 하는 ‘나타남’이기도 하다(18,19,22,28,47).
금, 은, 동, 철, 진흙으로 이루어진 신상이 보여주듯 나라들은 흥망성쇠를 거듭할 것이나 서로가 섞여 살며 더불어 번성하는 나라를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43). 그러나 사람에게서 비롯되지 않은 한 돌이 그 모든 나라를 부수어 흔적도 없이 지우고, 그 자신 거대한 산과 같은 나라가 되어, 온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다(34,35). 하나님이 세우실 한 나라가 모든 나라를 뒤로하고 영원히 서게 될 것이다(44).
금,은,동,철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오늘의 내가 신상의 발가락 어디쯤을 사는지 알 수 없으나, 서로 섞여 함께 살아내지 못하는 인간의 삶은 오늘도 여전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불안과 분노‘는 여전히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1,12), 오늘에서 도망하고자 하는 사람들간에 폭력의 무리수를 두는 성급함이 횡행한다(15). 그러나 오늘은 이곳 여기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 있다.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나 오롯이 존재하는 무수한 오늘들은, 그러나 결코 공포와 불안의 ‘폭력‘이 아닌, 영원히 망하지 않는 한 나라의 ‘통치‘를 마침내 드러낼 것이다(44). 잠 못 이루는 고통스런 날들을 지날지라도 오늘이라는 신비를 모두의 눈 앞에 열어 펼치시고 있는 하나님을(18,19,22,28,47) 작은 읊조림으로 찬양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19)... 그 지혜로 매일의 오늘을 마주하며 살아가기를(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