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장 - 포도원 품꾼 비유 (마 20:1-16)

비유의 결론은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이다(20:16). 이 결론은 부자 청년의 물음으로 비롯된 예수님의 말씀의 결론과 동일하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

말하자면 포도원 품꾼 비유는 앞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는 말씀에 대한 보충설명인 것이다.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어떻게 이 결론이 나오는가?...

12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 받은 사람이, 1시간 일하고도 자기와 똑같이 1데나리온 받은 자를 보고 분노한다. 그리고 주인에게 따진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20:12). - 이들의 말이 이치에 타당한가? 주인이 불의한가? 준다는 것을 주인이 안 주었나? 품삯을 떼어먹었나? 아니다. 주인은 의롭다. 의로워도 너무 의롭다. 그 너무 의로운 것이 오히려 문제였다.

일거리를 얻지 못하는 자가 태반이다. 오죽하면 오후 5시에도 아직 인력 시장에 사람들이 서성대고 있겠는가? 그러니 일자리를 얻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감사하며 일을 했을 것이다. 오늘 집에 들어가서 아이들 통닭이라도 사가지고 들어가야지, 마누라 선물이라도 사가지고 들어가야지 꿈을 꾸고 들떠서 일을 했을 것이다. 포도원 주인이 참으로 고마웠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일꾼들이 계속 들어온다. 처음 들어온 자들이 모든 일을 다 해내야 할 줄 알았는데 아니다, 다른 일꾼들이 시간마다 들어온다. 함께 일을 한다. 이 또한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품삯을 주는데, 1시간 일한 사람이 1데나리온이다. 자기는 12데나리온은 아니어도 최소 2-3 데나리온 받을 꿈을 꾼다. 그런데 아니다. 1 데나리온이다. 갑자기 불만이 밀려온다. 기쁨으로 일하던 자가, 계산을 하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품꾼으로 돌아간다.

이제, 나중에 온 자를 생각해보자. 오후 5시다. 일할 수 있는 시간이 1시간 밖에 없다. 그런데도 일거리가 없나 서성인다. 1/12 데나리온 밖에는 받을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런데 어떤 이가 와서 자기에게 일거리를 맡긴다. 1/12 데나리온 이라도 벌자 생각하고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에게 주인이 1 데나리온을 준다.

다음에 이 사람이 다시 이 포도원에서 일을 한다면 어떻게 일을 하겠는가? 품꾼처럼 일을 하겠는가? 다음 번에도 오후 5시쯤에 나와서 1 데나리온을 받겠는가? 그런 자들이 있을 것이다. 없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3진 아웃제 같은 법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 번에 일꾼으로 부름을 받는다면, 그는 단순한 품꾼이 아닌 주인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 일을 할 것이다.

주인의 선함이 만들어 내는 반응이다. 나중 온 자가, 주인의 은혜를 아는 자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성전 구제금으로 배당되었던 1/12데나리온 만을 가지고 가족에게 돌아가게 할 수 없어 하루치 일당 전부를 주고 있는 주인의 선함을 아는 자가, 단순한 품꾼이 아닌 주인의 사람으로 일을 한다. 품삯으로 유지되는 거래관계가 아닌, 은혜와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맺어진 관계, 그 관계에 충실함(믿음)으로 일을 한다. 사랑으로 일을 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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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장 -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마 20:20-28)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21) 자기를 찾아온 세베대의 두 아들과 그 어머니에게 예수께서 물으신다. 세베대의 두 아들이란 야고보와 요한이다. 야고보는 열 두 사도 중 가장 먼저 죽임을 당했다. 44년쯤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요한은 아마도 모든 사도들 중에 가장 오랫동안 살았고, 가장 마지막에 죽은 사도일 것이다. 처음과 마지막이다. 앞으로 닥칠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어머니가 와서, 네가 무엇을 원하는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두 아들을 예수님의 왕국에서 그의 좌편과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한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에게 물었던 물음을 예수는 바로 이어 나오는 여리고 근처에서 만난 두 명의 맹인에게도 묻는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32) - 이들의 대답은 단순하고 분명했다. "보기를 원합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표현한다. -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기 '원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기 '원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6-27)

자녀들을 위한 기도 중에 가장 많이 하는 것이 '꼬리가 아니라 머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이다. 사람은 큰 자가 되기를 원하고, 으뜸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본문에 사용된 단어는 다 비교형이다. 누구보다 큰 자가 되기를 원하고, 누구보다 앞선 자기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큰 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고, 절대적으로 가장 앞에 있는 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건 골치 아픈 일이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누구 보다는 위에 있고 싶고, 누구 보다는 더 앞에 있고 싶어'한다.

다른 사람은 다 괜찮아도 누구보다는 내가 위에 있어야 한다. 내 자식이 누구 아래 있는 것 같고, 누구 뒤에 있는 것 같으면 괜히 그가 미워지고 분노가 올라온다. 그 분노로 자식을 잡는다. 제자들도 그랬다(24).

권세, 세력, 부유….를 사람들이 원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사람은 누구 밑에 있고 싶지 않은 거고, 누구 뒤에 있고 싶지 않은 거다.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 스스로의 취미 판단을 통해 갖지 않는다. 부모의 욕망을 자신이 욕망하고, 타인의 욕망을 자신이 욕망한다. 평소에 전혀 가지고 놀지 않던 장남감도 누가 욕망하면 내게 중요한 것이 된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이랬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가장 크고, 가장 앞에 있는 분인 예수는 밑에 서려고 왔다. 사람들의 가장 마지막 자리에 서기 위해서 왔다. 왜 마지막 자리에 서는가? 사람을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주기 위해서다. 모든 사람들의 가장 밑자리에 서서 자기 앞에 있는 모든 이들을 책임지는 자로서 예수는 가장 뒷자리에 선다.

십자가를 앞두고, 고난의 잔을 앞두고, 예수께서 묻는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