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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비안의 죽음을 생각하며

생명이 탄생할 때는 기쁘다. 미래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미래가 있음으로 소망이 있다. 소망이 있기에 기쁘다.

죽음이 왔을 때는 슬프다. 과거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이 절망하게 한다.

과거엔 소망이 없다. 소망이 없기에 슬프다.

기독인은 미래를 바라본다.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소망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소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이다. 그래서 기독인은 죽음이 와도 슬퍼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망에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하다.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을 굳게 지키는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살전 1:3]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롬 15:4]

삶은 지금 경험하고 있지만 죽음은 경험할 수 없다. 죽음은 직접 경험할 수 없기에 단지 죽음의 의미를 묻

게 된다. 죽음의 의미는 죽음에 있지 않고 도리어 삶에 있다. 죽어서는 죽음의 의미를 물을 수 없으니 살

아서 묻는다.

육체의 죽음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누구나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은 그 평등한 죽음이 아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한 그 죽음과 다르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죽음은 엄마 뱃속에서

다시 나오는 생명을 뜻하는 게 아니며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오

는 똑같은 생명과 죽음이 아니다.

그저 몸뚱아리가 살아 있다고 누구나 다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들이 있고 죽었으나 살

아 있는 자들이 있다. 육은 살아 있으나 영이 죽은 사람이 있고 육은 죽었으나 영이 산 사람이 있다.

죽지마라! 어차피 한번 죽지 두 번 죽지 않는다. 어차피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하나님 앞에선 차이가

없다. 흙을 선택하는 죽음은 의미가 없다. 어차피 때가 오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까. 그 죽음은 하나님의 몫

이다. 그러니 살아서 삶의 기쁨을 누려라.

죽어라! 어차피 한번 죽지 두 번 죽지 않는다. 어차피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하나님 앞에선 차이가 없

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라. 그와 함께 죽지 않고선 새로운 생명이 없다. 새로운 생명이

없이는 삶의 참 기쁨도 없다.

기독인은 죽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죽는다. ‘죽기 위해 살지 않는다’에서의 죽음은 흙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런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므로 구지 그런 죽음을 위해 살 이유도 죽을 이유도 없다.

‘살기 위해 죽는다’에서의 죽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죽음이다. 곧 새로운 생명의 길이다. 흙으로 돌아

가는 길은 하나님의 몫이지 내 몫이 아니다. 내 몫은 오직 그 새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일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

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생명은 곧 영이다. 하나님께서 불어 넣으신 영이 생명이다. 하나님의 영이 참 생명이며 그리스도의 영이

참 생명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사람은 죽어도 살아 있다.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러나 죽지 않고서

결코 하나님의 영으로 살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영은 사랑이다. 생명의 영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하

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 사랑하라”이다.

서로 사랑할 때 참 생명이 그 가운데 있고 하나님이 그 가운데 계신다. 서로 사랑할 때 죽음을 이기고 영

원한 생명을 얻는다.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랑‘하기’ 위해서 태

어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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