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50>마태19– 모든 소유의 포기 (2010-04-21)

 

1.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19:3-12)

바리새인들이 다시 예수를 시험한다. 시험의 목적은 단순한 테스트가 아니다. 꼬투리를 잡아 넘어뜨리고 싶은 것이다.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 – 옳다/그르다가 바리새인들의 주제였고, 문제였다. ‘어떤 행동까지는 옳고, 어떤 행동까지는 그른가?‘

하지만 저들은 질문을 잘못하고 있다. ‘남자가 어떤 이유로 아내를 버리는 것은 정당하고, 어떤 이유로 버리는 것은 옳지 않은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나는 한 몸으로 부름 받은 아내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까?‘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나는 옳은 것을 행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바리새인들의 물음은 자기 변명이 되고, 그런 자기 변명은 결국 타인을 죽인다. 그러나 하나님이 짝지어 준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말씀 앞에 진지하게 자기를 세우는 사람은 어찌하여 나는 온전한 한 몸을 이루지 못하는지, 어찌하여 나는 아내와 남편을 나의 몸으로서 사랑하지 못하는지를 묻게 되다. 이 물음은 나를 하나님 앞에 세우게 하고, 겸손케 하며, 상대방을 존중하게 하며, 상대방을 살리게 된다.

나는 무엇을 묻고 있는가? 뚱딴지 같은 바리새인들의 물음. 아무 맥락도 없이 튀어나오는 저들에게만 중요한 논리들로 무장한 전문가들의 물음들! 사람이 사람과 살아가며 겪게 되는 삶의 문제와 아픔과 소소한 기쁨들과 관계되지 않는 이런 물음들을 묻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대단하다 생각하는 착각에 빠지지 않아야 할 것이다.

 

2. 모든 소유의 포기 (16-30)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부자 청년의 물음에 예수께서 답한다. “계명을 지켜라“ „“무슨 계명입니까?.... 그것들은 다 지켰습니다. 아직 무엇이 부족한지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

예수님의 대답은 답이면서도 답이 아니다. 네 소유를 버리고 나를 좇으라!

누가 이 명령을 따를 수 있는가? 나는 이 명령을 따를 수 있는가? 쉽게 생각하면 나는 가진 것이 없으므로 버리고 말고 할 것도 없고 당장에 예수를 좇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찬찬히 생각해보자. ‘나는 과연 지금 내게 여유 있게 주어진 것을 기꺼이 다른 사람과 나누고 있는가?...주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그렇지 못한 나를 발견한다. 좋은 것을 나누고 있는가? 더 좋은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있는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고 나누지 못하면서 어떻게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줄 수 있으며, 그렇게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 모든 소유의 포기! 자기 부인, 그리고 예수만을 좇음! 이 명령 또는 대답 앞에 나를 세운다.

포기하지 못하는 나, 아까워하는 나, 버리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와 동시에 이미 예수를 좇고 있는 나를 또한 발견한다.

베드로가 자랑스레 말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 맞다. 한편 사실이다. 그러나 정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그리고 나서 주를 좇은 것인가? 아니면 자기를 찾아와 부르신 주의 부름을 따라 주를 좇는 삶을 시작하면서 결국 모든 것을 다 버리는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인가? 당연히 후자다.

그런즉 누가 구원 얻을 수 있나이까?“… 스스로 구원 얻을 자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자격 없는 자를 건져내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하나님으로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격 없는 자를 불러, 예수를 좇는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시 선다.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 보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좇으라.“

내 모든 소유의 포기! 하늘을 소망함! 예수만을 좇음! 이 명령 앞에 오늘 다시 나를 세운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