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들으러 오다 (눅15:1-10)

2012년 3월 8일(목) 묵상

아무 맥락도 없이, 느닷없이 세리들과 죄인들이 등장한다.

소금된 그리스도의 제자, 제자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14:33-34)에 뒤이어, 뜬금없이 세리와 죄인들과의 식사 장면이 이어진다.(1-2)

그러고보니 눅 5장 27절-39절 문단에서도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잔치를 하신다.(29)   

눅5장에서의 잔치는 세관에 앉은 세리 레위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자 벌어진다.

헌데 눅15장 본문도 마찬가지다.

'모든 소유를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14:33)에 대한 요구에 이어, 세리들과 죄인들(1)과의 잔치가 벌어진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레위처럼 모든 소유를 버리고 예수를 따랐단 말인가? 본문에 그런 설명은 없다.

하지만 예수와 잔치하는 세리들과 죄인들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묘사가 있으니, 곧 "말씀을 들으러 나아왔다"는 것이다(1).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보고', '수군거린다'(2). 그러나 세리들과 죄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는다.'(1)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말을 가지고 예수께 가서, 그 말로 예수를 보고, 판단한다.

그러나 예수 곁에 모여든 세리들은 최소한 지금 자기들의 말을 버리고,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다. 

그러니, 자기 소유를 버린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의 말- 곧 '봄'을 놓아 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교회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해 모인 자들이 아닌,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자들이다(1).

잔치를 해서 기쁜게 아니라, 예수의 말씀이 기쁨을 만들고, 그 기쁨이 잔치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내 안에, 내가 가지고 있는 말들만을 이리 저리 짜 맛추는 것으로, 기쁨의 인생을 살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추구이다.

내 안의 말들을 내려 놓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러 그에게 가까이 나아간다. 그것이 제자의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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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돌이키다 (눅15:11-24)

2012년 3월 9일 묵상

말씀을 들으러 예수께 나온 세리들과 죄인들은 분명 '잃어버린 바 된 자들'(24)이었다.   

잃었던 자들 - 그들 편에서 볼 때, 그들은 하나님을 잃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잃어 버렸었다.

그런 그들이 스스로 돌이켜 예수께 나왔다. 무슨 일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일까?

본문은 유명한 '탕자의 비유'이다. 하지만 본문에 따르면 이 비유는 '두 아들 비유'(11)라 부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전반부는 '작은 아들'의 이야기이고(12-24), 후반부는 '큰 아들'의 이야기 이다(25-32).

작은 아들이 아버지 생전에 그 유산을 받아들고 먼 나라로 간다. 가서 재물과 존재와 인생을 낭비한다.

'허랑방탕하여'로 번역한 원문은 '인생을 포기한 사람 처럼 살다가'로 그 뜻을 새길 수 있다(13).

가진 것을 낭비하며 - 이곳 저곳에 흩어 버려 한 방향으로 집중하지 못하고 살다 보니 - 남은 것은 없고, 어느새 자기 자신 조차 잃어 버렸다.

"이미 버린 몸....", "인생 뭐 별거 있어! 다 똑같은 거지... 다 그저 그런거지...!" 그렇게 '포기한 사람'으로 살아갔다.

 그러다 흉년이 들었다(14). 하나님은 참 절묘하신 분이시다. 적당한 선에서 그를 건져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몰아 넣으신다.

큰 흉년이 들자 '작은 아들'은 이방인이게 자기를 의탁한다(15). 묘하게도 그 이방인은, 그에게 '돼지 치는 일'을 시킨다(15).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남아 있었다면, 죽으면 죽었지 돼지를 치는 일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를 잃었고, '포기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 '이미 버린 몸...'

돼지를 치면서 그는 더 추락한다. 큰 흉년에 먹을 것이 없자, 돼지들이 먹는 음식이 크게 보인다.

사람들에게 '돼지 먹이라도 내게 조금만 달라'고 간청하지만, 사람들은 번번이 거절한다(16).

'애이, 어떻게 돼지가 먹는 것을 사람에게 준단 말이오...! 그런 소리 하지 마시오...!"

아마도 그는 돼지 먹는 음식에 손을 대어, 돼지와 다투며 그 음식을 먹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다 돼지에게 조차 낭패를 당하고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부끄러움이, 그에게 잃어버린  '자기'를 만나게 했던 것일까?

그때 그는 '스스로 돌이킨다'(17).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라는 말의 원문은 '그가 자기 자신에게로 나아가 자신에게 말을 건낸다.'라는 뜻이다(17).

둘째 아들은 '자기 자신'을 만나러 한참을 뒤돌아 걸어간다. 살아온 지난 날들을 더듬어 아버지의 아들로 살았던 자기를 마침내 마주친다.

자기가 누구인지, 그런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드디어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미 버린 몸'이란 체념에서 "내가 왜 여기서 이렇게 부끄럽게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자각(자기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아! 내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조차 넉넉하다. 품꾼조차 존귀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굶주려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구나'(17)"

그는 드디어, 일어나, 자기 아버지께로 나아간다. 그길은 '잃어버린 자기'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잘못했습니다." - 스스로가 부끄럽고, 부끄럽다. 그래서 되뇌이고 또 되뇌인다.  "나를 품꾼의 하나처럼 여기소서!"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본다. 마음이 요동친다. 일어나, 달려간다. 안고, 입을 맞춘다. "내 아들아!"

아버지가 종들에게 말한다. "가장 좋은 옷을 가져와서 입혀라,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내 귀한 아들이 돌아왔다."

아버지를 잃고, 자기 자신도 잃었던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다시 자기를 발견한다.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길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길이었고, 아버지와의 만남은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기도 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예수께로 나아왔던 세리들과 죄인들은 이렇게 스스로 돌이켰던 것이었을까?

살아가면서 번번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분노에 마주친다. 그 때 내가 일어나 돌이켜 나아가야 할 곳은 '내 아버지 집'이다.

그곳에서 나는 잃을 뻔 했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 나를 맞아 주시는 아버지 눈 속에 비친' 나'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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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과 분노 (눅 15:25-32)

2012년 3월 10일(토) 묵상

둘째 아들에게 있어 '자기'를 찾아가는 돌이킴을 가능케 한 감정이 '부끄러움'이었다면(17;21)

첫째 아들에게 있어 '자기'를 찾아가는 돌이킴을 가능케 할 감정은 '분노'였다(28).

 '부끄러움'은 자기 가치를 무너뜨리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갖는 감정이다.

둘째 아들은 '스스로를 잃어 버리고',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는 자신'(17) 을 발견하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아버지의 귀한 아들'로서 자신을 찾게 된다.


 분노 또한 '자기 가치'에 대한 감각에서 발생한다.

타인에 의해 자신이 무시된다 느껴질 때, 자기 노력과 수고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 사람은 분노한다.

 수년동안 '종처럼 살아...가면서' 큰 아들은 스스로 느낄 때, 만족할 만한 '인정을 받아 본' 적이 없다(29).

죽자 종처럼 일했다. 동생이 돌아온 그날도 형은 밭에서 일을 했다(25).

그렇게 살아오면서 자신 안에 '분노'는 계속 쌓여 갔으나, 그는 자신이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다 동생이 돌아와 잔치한다는 소리에 비로소 형은 자기 안에 억눌러 놓은 분노와 마주치게 된다.

"나는 뭐냐? 지난 내 수년간의 고생과 수고는 뭐냐? 아버지는 뭐냐? 나는 무엇을 위해 그간 살아왔단 말이냐?"

 

분노는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다. 분노할 때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지', '스스로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발견하게 된다.

그 분노 속에서 형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아이야~!'라고 그를 불러주시는 아버지의 음성 속에서, 형은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예수께서 바리새인에게, 또 우리에게 물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