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 받을 생각 없이...(눅 11:1-13)

2012년 2월 22일(수) QT

유명한 주기도문, 한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 주시는 아버지에 대한 말씀이 이어서 나온다.

마태보다 짧은 누가의 주기도문은, 예수의 제자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내용으로서 주어진다.(1)

그들의 하루 하루는 하나님의 공급과 다스림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것을 매일 공급하신다.(3)

하나님 나라의 통치 속에 살아가는 제자들 역시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주며 살아간다.(4)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합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제자들은,

곁에 있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시간과 사랑과 돈과 마음을 빌려주었으나, 그것을 돌려 받지 않는 자들이다.

많은 이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으나, 예수의 제자들은 그 빚을 돌려 받을 생각이 없다.

냐하면 매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공급함을 그들 자신이 받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3)

하나님 또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빌려 주시나, 그것을 돌려 받을 생각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한 밤중에 찾아와 떡 세덩이를 빌려달라고 하면, 온 집안을 다 깨우더라도 기꺼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5-8)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면, 필요한 것을 줄 뿐 아니라, 더 좋은 것까지 주시는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9-13)

그러니 돌려 받을 생각 없이 주라. 하나님은 되찾을 생각 없이 자기 전부를, 성령을, 네게 주셨으니!(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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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진다( 11:14-28)

2012-02-23(목) QT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진다.(17) 스스로 갈라져 끼리끼리 나뉘는 집은 무너진다.

심지어 사탄 조차 스스로 분쟁하지 않는다. 자기들끼리 결속한다.

청소된 집을 발견하면, 일곱 귀신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산다.(26)

사탄 조차 힘을 따라 내부 질서를 세우고, 자기들 안에 평화를 만들어 낸다.(21)

(‚소유가 안전하다‘ -> ‚소유가 평안 가운데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서로 분쟁한다. 누군가와 함께 살지 못한다.

자기의 아들들 또한 귀신을 쫓아 내건만,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는 꼴은 보지 못한다.

내가 하는 일은 다 이유가 있고, 남이 하는 일은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다.

모두를 쫓아 내었기에 그 마음이 텅 비어 있다. 그 빈 마음으로 귀신이 들어온다.

스스로 분쟁하는 집안, 스스로 분쟁하는 교회, 스스로 분쟁하는 마음으로 괴롭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28) 그러면 상한 마음을 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이다.(20)

나와 분쟁하고 있는 자들이, 내 형제 자매임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평행본문 막 3:36)

사탄조차 분쟁하지 않고 함께 살 줄 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의 자녀들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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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눈 (눅 11:27-36)

2012년 2월 24일(금) QT

"몸의 등불은 눈이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다." (34)

눈을 감아보라, 그리고 떠보라, 그러면 눈이 등불임을 알게 될 것이다.

눈은 내 몸을 비추는 등불일 뿐 아니라, 온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기도 하다.

그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다. '성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본래 '단순하다'라는 뜻이다. 

단순해야 밝게 본다. 밝게 보면, 분명히 보면, 단순해 진다.

 

요나 보다 나은 이, 솔로몬 보다 나은 이가 눈 앞에 있다. 그의 선포가 옳고, 그의 지혜가 깊다.(31-32)

단순한 눈을 가진 이들이 그를 알아보고, 그를 따른다.

남방 여왕은 단순하고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듣고 땅 끝에서 그를 만나고자 찾아온다.(31)

그를 만나 그의 지혜를 듣고, 그와 그의 하나님을 찬양한다.

니느웨 사람들 또한 단순한 눈과, 마음을 지녔다. 요나의 선포를 듣고, 두려움과 기대 속에 스스로 돌이킨다. 금식하고 회개한다.(32)

요나가 누구인지, 어디 출신이지, 무슨 숨겨진 의도가 있는지에 앞서, 그의 선포가 옳음을 본다.  

회개하지 않으면 40일 이내에 온 성이 무너질 것이다. 회개할 것이 있는 자기를 보고, 돌이킨다.

예수에게 나아와 표적을 구하는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29)

내 눈은 어떠한가?  

기꺼이 땅끝에서라도 길을 떠난 남방 여인처럼 나는 참되고 지혜로운 예수의 말씀을 따라, 내 인생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표적을 구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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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저녁식사 (눅 11:37-54)

2012년 2월 25일(토) 

불편한 저녁식사의 광경이 펼쳐진다. 상처 입은 자존심(45), 분노, 변명, 비난, 무시, 높아진 목소리...

생채기 난 마음을 풀지 못한 채로, 많은 말들을 마음에 담아 둔 채로,(53) 몇몇씩 모여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남겨두고

저녁식사는 파해지고, 예수님은 떠나간다.(53)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그들의 앉은 식탁엔 사실이지 수 많은 선지자들(50), 의인들(51), 하나님을 찾는 자들(52)의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평온해 보였던 그들의 겉모습 뒤엔, 수 많은 이들의 눈물과 한숨, 절망과 고통이 켜켜이 쌓여져 있었다.

애써 손을 씻고 또 씻어도,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쳐도,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며도

그들의 마음은 무덤이다.(44)

율법은, 성경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어졌다. 사람을 살리는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서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사람을 죽였다. 

'법'을 따라 무거운 짐을 사람에게 지워놓고, 그 짐을 지고 있는 사람에겐 한 올의 관심도 없다.(46)

마음으로부터 사람을 사랑하여 자기 것을 내어 주는 일을 해 본 적이 없다.(41)

사람이 없는 식사는 즐거울 수가 없다.

그렇게 불편한 식사가 파하고, 상처난 마음만이 떠다니는 저녁!

그들은 상처난 자기 안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했던 떠들석한 잔치자리.... 그런 저녁식사를 하고 싶다. 마음 따뜻한 사람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