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아버지(눅 10:17-24)

2012년 2월 20일 QT

70인이 기쁨으로 돌아와 보고한다.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니, 귀신들도 복종하더이다." 예수가 대답한다. "내가 너희에게 그런 권세를 주었다."

"그러나 너희가 기뻐해야 할 것은,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 그리고나서 예수께서 신비로운 말씀을 하신다.

 "아버지 만이 아들을 알고, 아들만이 아버지를 안다. 또한 아들이 아버지를 보여주기 원하는 자들 또한 아버지를 안다. 나를 통해 아버지을 알고 듣고 보고 있는 너희들은 복이 있다."

제자들은 지금 아버지가 누구며,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보고 있고, 듣고 있다. 제자들은 지금 아버지를 알고 있다. 알아가고 있다. 

아들인 예수께서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은 지혜의 추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아들들이 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젖먹이들이 아버지를 안다면, 그것은 그들이 아버지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아들만이 아버지를 아는데, 제자들 또한 예수를 통해 아버지를 알고 있으니, 그들 또한 하늘 아버지의 아들들인 것이다.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 그들 또한  권세가 있다.

뱀과 전갈을 밟고, 사탄을 복속시키는 권세가 그들에게도 있다(완료형이다. 그러니 그들은 돌아온 지금도 그 권세를 가지고 있다.) 

나 또한 예수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알았고, 들었고, 보았다. 매일 그의 임재와 인도 하시는 손가락을 본다.

왜냐하면 나 또한 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로서 나 또한 권세가 있다. 권세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늘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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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섬김의 한가지 원칙 (눅 10:25-42)

2012년 2월 21일 QT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마음이 분주한 마르다에 관한 이야기다.

영생은 '사랑' 속에 발견되고(10:25-28), 사랑은 '섬김'(디아코니아)으로 나타난다(10:38,40). 

사랑과 섬김이 영생의 길을 연다고 하지만, 그 때 주의해야 한다.

'인정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섬긴'다면, 그 '사랑과 섬김'은 영생이 아닌, 근심과 고통을 가져다 준다.

사랑은 '옳게 보여지고자' 행하는 것이 아니라(29), 누군가를 '옳게 보아 주는 것'이다(37).

사랑은 '인정 받고자' 행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인정해 주는'것이다(37).

인정 받고자 행동할 때, 사람은 영생이 아닌, 지옥을 산다.

누군가를 인정해줄 때, 알아줄 때, 고통 중의 누군가가 불쌍해 보일 때(33), 그래서 그들 위해 아낌 없이 사랑을 쏟을 때(34), 그는 영생을 누린다.

섬김도 마찬가지다.

섬기면서 필요한 한 가지를 놓치게 되면, 마음은 분주해지고, 염려와 근심이 마음을 사로 잡는다. 실컷 고생해 놓고, 마음에 기쁨이 없다.

섬기는 자가 가져야 하는 마음은 오직 '한 가지'다.(42)  그것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이다.

섬김은 '대접하는 자 편'에서 좋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대접 받는 자 편'에서 그의 좋아 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섬기는 자는 '자기 마음을 만족 시키고자' 섬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을 만족 시키고자' 섬기는 것이다.  

섬기는 자가 헤아려야 할 한 가지 마음은, 자기 마음이 아니라, 그의 마음이다.

섬기면서 분노한다면, 그 때 그는 도대체 누구의 마음을 위해 섬기고자 했는지를 기억해 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