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내 병상의 맞은편에
74세의 할아버지께서 새 식구로 들어오셨다.
키도 크고 제법 멋도 풍기시지만
간호 차 따라오신 할머니께는
굉장히 고압적인 신경질을 부리곤 하셨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치매증세도 보이는
할아버지께 할머니는 투덜거리면서도
시중을 들어주시고 계셨다.
병상의 어색한 하루가 지나면서 할머니와 나는
가까워 졌고 할머니는 내게 푸념식의 흉허물을
털어놓으시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참으로 드라마 같은,
49년 동안 꼭꼭 매어놓았던 탄식과 한의 보따리였다.

할아버지는 49년 만에 돌아오셨고,
함께 사신지는 4년이 되었다고 한다.
가평이 고향인 할아버지는 결혼하여 첫 아들을 낳고
첫돌이 되기도 전에 군대를 가셨고,
몇 년 만에 휴가차 잠시 고향엘 들렀다가
둘째를 임신시키고는 소식이 두절되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49년 간
온갖 허드렛일과 행상, 품팔이를 하며
아들들을 키우고 교육을 시켜 오셨던 것이다.
그야말로 생면부지의 타향에 시집와서
고난과 역경으로만 점철된 질곡의 49년이었다.

자식들 훌륭하게 잘 키워내고 두 다리 뻗고
편히 쉬며 살려했는데 어느 날 병든 몸만을
달랑 이끌고 할아버지가 돌아왔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군에 입대하면서 부대 근처의
처녀를 속여 다시 장가를 갔고 세 명의 자식들을
낳고 교육시키고 출가까지 시키면서 살아왔는데
나이 들어 병이 들자 후처가 온갖 구박을 하며
끼니도 잘 챙겨주지 않아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할머니를 찾아 오셨다고 했단다.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어느 누가 과연 그 같은 상황에서
남편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만
할머니는 다니시는 교회의 목사님 말씀 때문에
할아버지를 용서하고 받아들이셨다.

"하나님께선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 고 하셨으니
"안 그러면 내가 죽어서 하나님한테
혼날 것 아냐" 라고 하신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너무도 당당하기만 한
할아버지를 보자 분노가 솟구쳐 오르기도 했으나,
할머니의 그 온전한 믿음과 당당한 실천 앞에서
그렇지 못한 내게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잠재울 수 없었다.

신께선 아마도 진실한 믿음과 용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 노부부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이 아닐까.
두 분이 늦게나마 따뜻한 온기를
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 김 원 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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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소임이 있는데
주는 것과 용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슴 속에서 쓴물이 되어 올라와
눈물과 함께 아프게 삼켜야했던
아픈 상처들도 용서하면 치유됩니다.




-사랑밭 새벽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