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3선악의 지식과 생명

 

하나님이 아닌 이상 모든 존재는 유한하다. 그의 유한함은 결핍이나 부족이 아닌 그의 그다움을 만들어내는 존재 조건이다. 그러한 존재 조건, 존재 방식을 보통자연이라 부른다. 이 자연이 존재에자유를 부여한다. 자연은 한편 자유의 한계로 작용하나, 동시에 주어진 자연이 없다면 자유 자체가 발생할 수 없게 된다. 자연은 자유의 한계이며 동시에 자유의 가능조건이다.

 

자연은 처음부터 그저 주어진다. 주어진 길, 주어진 존재 방식, 주어진 법칙을 따라 운행된다. 지구는 태양을 돌고, 달은 지구를 돈다. 꽃은 피었다 지고, 나무는 뿌리를 땅으로, 가지를 하늘로 뻗어 자란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 그에게는 자기 자신의 삶의 길을 정할 수 있는 특별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2:16-17,19,24). 자연이 자유를 조건짓듯, 사람의 선택의 자유에는 금지가 따라 붙는다(2:17) 그런데 주어진 금지는 막연한 무조건적인 금지가 아니다. 금지가 자유를 조건 짓는다 할 수 있지만, 여기서 금지는 단지 금지이기에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의 지식에 대한 금지이기에 의미 있는 것이다.

 

선과 악의 지식에 대한 금지는 그런 의미에서 숨을 쉬지 않으면 죽고, 밥을 먹지 않으면 죽듯, 선과 악의 지식을 사람이 가지면 죽는 그런 자연적 조건과 같은 금지이다.

 

선과 악의 지식이 왜 사람에게 죽음을 낳는 것일까(2:17)? 선과 악의 지식이란 본래 다만 윤리적 판단 규정만이 아닌 보다 근원적인 좋음과 나쁨의 구별을 뜻한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좋음과 나쁨을 사람 자신이 정하겠다는 것이 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 이미 심히 좋다고 선언한 만물에 대해(1:31) 사람이 좋음과 나쁨을 정하겠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위에 서겠다는 것이고, 그 자신이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이다(3:5).

 

그러나 사람은 도대체가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있어 좋음과 나쁨의 기준은 오직 자기 자신일 뿐이다. 나에게 좋다, 나에게 나쁘다가 기준일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도대체가 스스로에게 있어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유한한 사람이 좋음과 나쁨의 판단을 시작하자마자 나타난 첫 번째 판단은 자신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3:7). 스스로가 부끄러운 사람은 자신을 가렸고(3:7), 타인을 나쁘다고 선언하는 데로 나아가게 되었다(3:12,13). 그리하여 자신이 자신을 정죄하고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는 상황 속에서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은 날이 갈수록 죽어갔다. 아니 선악의 지식나무를 먹는 그 순간 사람은 죽음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기쁨의 동산 에덴에서 가정을 이루고 생명을 누리며(2:24), 선택하고 결정하며(2:20,24), 경작하고 지키며(2:15), 생육하고 번성하며(1:28) 살아갈 수 있었던 사람,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없는(2:25), 좋구나 선언하신 하나님의 기쁨을 따라 자신과 서로와 하나님을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삶은(2:23), 이제, 좋음과 나쁨에 대한 나름의 판단 속에 동생 아벨과 하나님을 정죄하고(4:5,8), 자신을나쁘다선언한다 여겨지는 누군가를 지우고자 하는와의 싸움 속으로 던져지게 되었다(4:7).

 

성경 전체에서 처음으로라는 단어가 나타나는 곳인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행했던 일은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의 판단에 대한 그 자신의 가치 판단이었다(4:6). 가인의 후손 라멕의 노래는 가치의 자기 중심성이 낳는 죽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4:23-24).

 

누군가의 눈빛이 내게 상처가 되는 것은 그가 나를 나쁘다 여긴다고 나 자신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눈빛에서 나에 대한 비난을 읽어내는 것은 사실 나 자신이 나 자신을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4:23-24).

 

스스로 부끄러워 자신을 가리는 자들, 좋음과 나쁨의 판단 앞에 벌거벗은 듯 드러나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자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그러나 선/악의 판단이 아닌 그들을 덮어주고, 그들을 살려주고, 그들의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었다(3:20-21).

 

그러니 소망은 있다. “누가 네가 벗었다고 뭐라고 하더냐? 누가 네가 벗었다고 너를 고소하더냐(‘히기드‘)? 누가 네가 벗었다고 네가 나쁘다고 하더냐?(3:11) 물으셨던 하나님은 그런데 아담이나 하와를 고소하지 않는다. 그들의 수치를 폭로하는 손가락질이 아닌, 그들이 수치라 여기는, 그가 지어주신 그들의 몸을, 덮어 주신다.

 

주어진 징벌은 생명이 생명답게 누려지지 못하게 되는 수고와 고통의 삶이다(3:16-19). 사람이 좋음과 나쁨을 정하겠다 나서면서 서로를 고소하는 동안, 자연을 정죄하는 동안, 어떠한 생명도 생명답게 누려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속에서도 그들에게 생명의 이어감을 허락한다(3:15,20). 그 허락의 조건 또는 근거는 아마도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이 행할 일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3:15). 그러나 아직은 창세기 3장이다.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에 대해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8:11)고 말씀하신다. 그녀를 나쁘다 선고하여 돌로 치지 않고, 다시는 죄의 자리에 머물지 말라고 말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세상을 정죄하고자 함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고자 함"이기 때문이다(3:17).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그리하여 정죄 가운데 죽음을 사는 자들을 향해(3:18)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신 것은 정죄의 손가락이 아닌 자신의 생명이다. 선과 악의 지식이 아닌 생명을 주는 그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