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가야 올라간다 (눅14:1-14)

2012년 3월 5일 QT

율법 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 보는 바리새인들과 달리, 사람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법을 바라보는 예수님은

오늘도 안식일에 수종병(부종) 든 사람을 치료한다.(2)

안식일에 물에 빠진 소나 나귀를 건져 낼 수 있다면, 안식일에 물에 빠진 사람 (- 온 몸이 부은 사람) 또한 물에서 건져낼 수 있다. (3)

고통하는 자 편에서, 그 사람과 같은 자리에 자신을 두시는 예수님은, 은혜 베푸시는 하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율법 위, 높은 자리에 앉은 바리새인은(7), 스스로 높이 있다 여기나, 거기에 하나님은 안 계시니, 그들은 가장 낮은 자들이 되고 만다(9).

낮은 데로 내려가는 길은, 사람과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며, 그 곳에서 만난 하나님으로 인해, 가장 높은 곳에 서게 되는 길이기도 하다.

높은 데로 올라가는 길은, 사람도 하나님도 만날 수 없는 길이며, 오직 자기 만족만을 만나고, 그 정점을 넘어 추락하게 된다.

잔치를 베풀려면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맹인들을 청해야 한다.(13) 그래야 부활시에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4)

하나님이 계신 곳이 가장 높은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낮은 곳에서, 낮은 자와 함께 하시며, 그들을 높은 곳으로 올려 주시는 분이다(11). 그러니 예수님처럼 낮은 곳에 서야 한다.

율법의 자리에서 사람을 내려다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내려가야 올라가고, 올라가면 내려간다. 에스컬레이터 처럼...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야, 올라 가는 계단이 생기는 법이다.

올라가고 있다고 기뻐 말고, 내려가고 있다고 슬퍼 말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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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권하여 데려오라(누가복음 14 15~24절)

2012-03-06 묵상

율법의 울타리 안에서 각자에게 중요한 일들만을 붙들 뿐(18), 하나님을 붙들지 못한 이들,

율법 안에서 자기를 대접하느라 하나님의 부름을 듣지 못한 채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맛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24).

새로 산 밭을 보러 가는 일, 소를 시험하러 가는 일이 급한가? 중요한가?

주인은 이미 오래 전에 그들을 초청했으니, 그 초청을 귀히 여겼다면 미리 자기들 일정을 조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설혹 일정이 조정되지 않았더라도, 그들이 주인의 초청을 귀히 여겼다면, 마땅히 주인의 잔치자리에 갔을 것이다.

방금 결혼한 이에겐 물론 여러 의무가 면제된다. 일년 동안 아내와 행복을 누리도록 율법이 배려하고 있다.

그런 정당성을 내세우며, 그러니 나는 초청된 잔치에 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 초청을 귀히 여겼다면 어찌 갈 수 없었겠는가?

주인은 자기의 초청을 귀히 여기지 않은 이들을 버려두고, 주인의 초청을 은혜로 알고, 귀히 여길 사람들을 불러 오기 시작한다.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 저는 자들을 초청한다.(21)

앞선 문단에서 예수님은 이미 잔치를 베풀려면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을 초청하라“(13)고 하신다.

왜냐하면 이들은 되갚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 대접을 귀히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런 자들을 초대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그들은 주인의 초청을 참으로 귀히 여길 것이고, 그 은혜를 기억할 것이다.

강권하여 데려오라‘(23)는 말은 억지로, 강제로 데려오라는 뜻이 아니다.

근동에선 가장 가난한 자라도 체면을 차리는 법이다. 원하면서도 선뜻 가겠다고 하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 그들을 두 번 세 번 권하여 그들의 체면을 세워 주라는 뜻이다.

당신들은 참으로 귀한 귀빈이니 꼭 와 주십시오라는 의사를 반드시 전달하라는 뜻이다.

못이기는 척 온 그들은 참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집 주인을 만나, 집 주인과 함께 잔치한다. 은혜를 누린다. 존중과 대접을 받는다.

그러니 나중 초대된 그들이, 오히려 주인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집 주인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이다.

나는 나중에 초대 받은 가난한 자, 저는 자, 몸 불편한 자, 맹인이다.

집 주인,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감사와 사랑과 존경이 내게 있으니, 어찌 은혜를 입은 그들이 내가 아니겠는가?

이 은혜 보다 더 크고, 더 급하고, 더 중요한 나의 일에 혹시 사로잡혀 있다면,

일상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을 듣지 못하고 있다면, 누군가를 초청하여 대접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집 주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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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추구 (눅14:25-35)

2012년 3월 7일 묵상

예수께서 수많은 무리와 함께 길을 가시다가, 갑자기 멈추어 서서, 무리를 돌아보며, 뜬금없이 말씀하신다.(25)

"누구든지 자기 집안 식구 그리고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내 제자가 될 수 있는 길은 없다"(26)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내 뒤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내 제자가 될 수 있는 길은 없다."(27)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기 뒤를 따라 오는 무리들이 갑자기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이들은 뭘 알고서 나를 따라 다니는 건가?'

그래서 말씀하신다. "건물을 짓건, 전쟁을 하건, 계산을 하고 헤아려 보고 일을 시작한다.(28-32)

그런데, 당신들은 나를 따라다니면서, 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값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나는 갑자기 걱정스럽다...."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당신들의 전부를 포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어떤 수를 쓰더라도 내 제자가 될 수 없다.(33)" 


 많은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런 불가능한 추구를 하며, 교회를 다닌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고서, 자기 목숨을 버리지 않고서, 예수를 따른다는 불가능한 추구를 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면서, 하나님이 건드려서는 안되는 '나만의 영역'이 남아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길이 없다.

모양만 소금일 뿐, 짠맛이 나지 않으니, 소금이라 할 수 없다.(34)

 

소금은 그 전부가 짜다. 짜지 않은 것은 소금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목숨, 시간, 재산, 재능, 인생, 가족, 목적, 비전, 건강, 몸, 생각... 그 전부가 다 '그리스도의 것'이다.

'내 것'이라는 영역이 남아있는 한, 두꺼운 고무줄로 묶여진 타이어를 허리에 두르고 달리기 하는 사람 처럼, 결국 제자리를 맴돌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어디에도 쓸 데 없어 버려지는 인생이 될 것이다.(35)

제자냐 아니냐,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 소금이냐 아니냐가 있을 뿐, 그 중간은 있을 수 없다.

그 중간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한 추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