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4~5엘리바스, 고통의 인생을 말하다. (4:1-5:27)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욥의 얘기를 듣고 불편해진 엘리바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침내 욥에게 답을 주고자 한다. “나라면 (너처럼 생일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할 것이다.“(5:8) “네가 비록 전능자의 징계를 받고 있지만, 그것을 업신여기지 않는다면 마침내 구원과 평강과 장수를 누리게 될 것이다.“(5:17-27)

 

엘리바스의 말은 그러나 욥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다(6:14). 고통 중에서도 욥의 자랑이 있다면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살아온 그의 인생이다(6:10). 그런 욥에게 엘리바스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으며, 사람이 어찌 창조주보다 깨끗하겠는가‘(4:17) 묻는다.

 

진흙뿐인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지혜를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무한히 크고 높은 분이며, 사람은 다만 그 앞에서 부족하고 깨끗하지 못한 존재로서, 마치 불꽃이 위로 날아가듯 다만 고생을 위해 태어났을 뿐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4:19;5:7).

 

엘리바스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것은 고통이며(5:7) 고통을 감하는 길은 겸손이다(5:12).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무한한 간극이 있어서(5:9) 어떠한 인간도 그 앞에 완전할 수 없고, 따라서 징계와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에 대해 사람은 하나님을 찾고 그의 처분을 기다릴 수 있을 뿐이다(5:8).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를 찾는 겸손한 자를 일으키시고, 그에게 평안을 주실 것이다.

 

엘리바스의 세계에서 고통은 당연한 인간의 몫이며, 복은 겸손한 자에게만 허락되는 은혜다. 그러나 고통 중에서 자기 생일을 저주하고 있는 욥에게서 고통은 당연한 인간의 몫이 아니다. 오히려 삶은 빛이고 풍성함이고 복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직하게 살아간다면 사람은 마땅히 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착한 일을 했으니 복을 받아야 한다는 인과율에 의한 보상을 말하는 것 아니다.

 

욥의 세계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짓고 그의 인생을 축복하셨다. 범죄와 어리석음으로 스스로 고생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인간은 살아 있음이 기쁨인 오늘을 살아 마땅하다. 때문에 욥은 살아 있음이 고통인 오늘, 하나님 앞에서 호소하고 하소연한다.

 

엘리바스가 복을 누릴 자격이나 권리가 사람에게 없으며 흙일 뿐인 사람은 다만 고생을 위해 지어졌다고 말한다면 창세기는 욥과 더불어 말한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과 사람을 짓고 그들에게 축복을 명하셨다고.

 

엘리바스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간극은 너무도 커서 사람은 하나님의 처분만을 바랄 뿐이라 말한다면, 성경은 욥과 더불어 말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었으며,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 곧 그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통치의 대리자이며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라고.

 

인생은 고생을 위해 지어지지 않았다. 인생은 사람이 자초한 고통을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 짊어지고 그들에게 복을 회복시키시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래서 욥은 지금 당혹스럽고 욥은 더욱 고통스럽고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고통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냐고 따져 물을 수 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