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 (역대상 19장 1절~19절)

- 2012년 5월 20일 주일 묵상

사람의 진심의 값은 얼마일까? 은 천달란트를 준들 진심을 살 수 있을까(6)?

암몬 왕 나하스가 죽고, 그 아들 하눈이 왕이 되었다. 고인이 된 나하스의 호의를 입었던 다윗은, 이제 그 아들 하눈에게 호의를 베풀고자 한다.

진심! 짐심을 다해 사절단을 보내 문상을 하고자 한다(2).

그런데 그 진심은 외면 당했고, 오히려 모욕으로 되돌아왔다.(5)

진심만이 진심을 알아본다. 사람의 진심을 헤아리고 받아줄 진심이 있어야, 누군가의 진심이 보이는 법이다.

갓 왕위에 오른 하만과 그 주위의 방백들은 저마다 자기 몫을 챙기려는 마음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할 마음 중심이 없다(6).

하만이 은천달란트로 병거 삼만과 아람 용병을 교용하고, 다윗을 치러 올라온다.

어마 어마한 군세다.

그 군세 앞에 선 요압과 아비새 -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서로를 격려한다.

"힘을 내자.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을 위해 힘을 내자. 여호와께서 선하게 행하실 것이다."(13)

거대한 군대를 앞에 두고, 목숨을 다해 싸울 각오로 나가는 요압과 아비새, 그리고 이스라엘의 군대 앞에

돈에 팔려왔을 뿐, 전쟁에 마음이 없고, 싸움에 진심이 없는 아람 군대들은 도망한다(14).

그들의 도망을 보고 암몬 또한 도망한다(15).

더 많은 군사와 군인들이 아람에서 내려온다.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이 온 이스라엘과 함께 나아간다.

돈에 팔려온 군인들과 자기 식구들과 하나님의 성읍을 지키기 위해 나온 이스라엘... 벌어들인 돈을 셈하는 자들과 진심으로 전쟁을 대하는 자들 사이의 싸움은 더 이상 군세나 무기가 문제가 아니었다. 4만 명의 목숨이 무참히 사라진 뒤에야, 아람은 암몬을 떠나간다.

진심! 나에겐 누군가를 향한 진심이 있는가? 나에겐 누군가의 진심을 알아볼 마음이 있는가?

돈에 휘둘리지 않고, 명예에 휘둘리지 않고, 세력에 휘둘리지 않는 진심 - 진리를 향한 한 마음이 내게 있는가?

맡겨진 생때 같은 목숨 전장에 몰아 넣고서야 정신을 차린다면 너무 늦으리라!

수염이 잘린채 모욕 받고 돌아온 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수염이 다 자라기까지 보고를 받지 않기로 한 다윗의 진심. 진심을 헤아릴 줄 아는 마음, 그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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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심 (역대상 20장 1절-8절)

- 2012년 5월 21일 월요일

방심(放心) - 마음을 다잡지 않고 풀어 놓아 버림. 안심하여 주의하지 않음.
긴장하고 걱정했던 일이 그렇게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 될 때, 사람은 마음을 놓는다. 항상 긴장하고 산다면 그 또한 문제가 있을 것이다. 마음 놓고, 쉬기도 하고, 새 일을 계획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심(마음을 놓음)'의 상태가 길어지다보면, 사람은 마땅히 가져야 하는 마음 줄 자체를 놓아 버리기도 하나보다. 독일어에 Geistesabwesenheit.라는 말이 있다. 번역하자면, '정신 줄을 놓은 상태'라 하겠다. 방심이다.

다윗은 역대상의 짧은 본문(20:1-3)에서 말 그대로 정신줄을 놓는다.

암몬과의 전쟁은 해를 넘겨 계속되었다.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 군대가 암몬 깊은 진영까지 진군하여 들어간다. 주도 랍바를 공격한다. 그런데 다윗은 홀로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1). 역대상이 알고 사용했을 것이 분명한 사무엘하는 홀로 남아 있던 다윗이 범한 끔찍한 범죄를 가감없이 보여준다.(밧세바, 우리야) 그러나 역대상 기자는 그 내용 전체와 그로 인한 귀결이라 할 수 있는 가족 간의 칼부림, 반역 등의 역사를 완전히 제거해 버린다.

왜? 다윗의 치부를 들춰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 보인다.
역대상 기자는 사무엘하 11:1-22:22의 내용, 곧 열 한장에 해당하는 내용을 오늘 본문에서 단 8절로 기록한다. 전 내용을 요약하는 방식이 아니라, 칼날 같은 편집을 통해 그리 한다. 20장 1절-8절은 삼하의 본문 중 세 곳의 문장을 잘라 붙여 놓는 방식으로 삼하 11장의 내용을 요약한다. 역대기가 다윗의 범죄를 가리고 싶었다면,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니'라는 부분도 잘라냈어야 했다. 그런데 역대기 기자는 열 한장 전체를 통 편집을 하면서도, 그 한 줄은 잘라내지 않고 있다.

다윗은 왕들의 출전하는 그 때, 군대가 랍바를 공략 하고 있을 때 홀로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 그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역대기 기자는 그 부분을 제거하지 않는다. 방심한 다윗.

요압이 랍바를 함락했을 때(다윗이 점령한 것이 아니었다), 다윗은 왕관을 빼앗고, 그 무게를 달아본다. 금 한달란트다(2)! 다윗은 그 왕관을 자신이 쓴다(2). 이전에 다윗은 무수한 전리품들을 자신이 취하지 않고, 여호와의 성전을 위해 따로 구별하였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성전은 열국의 재물로 건설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신 줄을 놓은 다윗은 금 한달트에 현혹되어, 자기 머리 위에 그 왕관을 쓴다. 나아가 암몬 족속의 힘의 근원을 끊어 버리는 방식으로 노략이 진행된다.

이런 다윗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기록으로 역대기 기자는 다윗의 현재와 과거를 날카롭게 대비시킨다.

바로 키 큰 자들인 아낙 자손에 대한 기록이다. 엘하난이 골리앗의 아우를 죽였고, 다윗의 조카 요나단이 이스라엘을 능욕하던 가드 거인을 죽인다. 그런데 역대기 기자는 '다윗의 손과 그 신하의 손에 키 큰 자의 소생이라도 다 죽었다'고 기록한다. 20장 본문엔 다윗이 아낙 자손을 죽인 기록이 없다. 그럼에도 역대기 기자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을 때를 떠올리게 한다.

엘하난(하나님은 은혜롭다)과 요나단(여호와께서 주셨다) 이 두 사람이 아무 것도 없던 다윗 처럼, 물맷돌만으로 충분했던 다윗처럼, 하나님을 모욕하던 거인들을 제압한다. 홀로 왕궁에 남아 범죄하고, 금 한달란트 짜리 탈취물로 왕관을 쓰고 있는 다윗의 모습과 물멧돌 하나로 골리앗을 제압하던 다윗의 모습. 어떤 모습이 이스라엘의 왕의 모습이겠는가?

하나님은 은혜롭다(엘하난), 여호와가 주셨다(요나단) - 이 두 이름이 골리앗을 이긴 영웅 다윗의 모습이었고, 이스라엘의 참된 힘의 근거였다. 이 근원을 마음에서 놓아버린 방심의 시간은 지독히도 고통스러운 사건들이 자라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정신 줄을 놓고, 방심한 다윗의 이야기는 21장의 인구조사로까지 이어진다. 물멧돌 5개를 골라 담으며, 거대한 골리앗이 아닌 하나님 앞에 무릎 꿇던 다윗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돌이켜 마음을 놓아버려도 되는 순간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