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브리아 (역대상 7장 1절 ~ 8장 40절)

- 2012년 5월 5일 토요일 묵상

잇사갈(레아), 납달리(빌하), 아셀(실바), 므낫세-에브라임- 베냐민(라헬)의 족보가 이어진다.

수 많은 이름 중, 눈에 띄는 이름이 하나 있다. 바로 브리아다(7:23; 7:31; 8:13). 아들을 잃은 슬픔에 싸인 에브라임 가정에서 태어난 브리아.

그 이름의 뜻이 '재앙 중에 태어난 자'이니(7:23),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름대로 '재앙 중'에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재앙'을 당한 가정에 '복'을 가져다 줄 것인가? 역대기 기자는 족보로 답한다. 브리아의 족보는 재앙을 이겨낸다. 브리아의 자손으로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태어난다(7:27).  아셀 지파의 브리아도 남다른 인생을 산다(7:30). 아셀의 네 아들 중 그 족보를 이어가는 우두머리요 용감한 장사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브리아의 자손들이다(7:31). 마지막으로 베냐민 지파의 브리아는 아얄론 주민의 우두머리가 되어 가드 주민을 쫓아낸다(8:13 - 에브라임의 아들 브리아의 형제는 가드 족속에게 죽임을 당했었다). 베냐민의 브리아가 우두머리가 되었던 아얄론은,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의 요청으로 아모리 사람들을 칠 때 저들과 싸워 이겼던 전설적인 장소이다. - "태양아 기브온에 머물러라, 달은 아얄론에 머물러라"(수10:13).

자식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태어난 아들, 재앙 중에 태어난 자 브리아! 그러나 그는 '재앙 중에 태어난 자'라는 이름을 달고도, 오히려 재앙을 극복하고 이겨낸다. 싸워 승리한다. 아얄론의 전설적인 승리를 일구어 낸다. 포로기라는 극심한 재앙을 겪고 나온 또 다른 브리아들에게 역대기는 말한다. '재앙 중에 태어 났다고 재앙 중에 살아가야 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에브라임과 아셀과 베냐민의 브리아들을 보라! 그리고 담대해라! 용감해라! 운명과 정면으로 마주서라. 그리고 싸워 승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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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함 (역대상 9장 1절~44절)

- 2012년 5월 6일 일요일 묵상

유다의 신실하지 못함('범죄(1)'=> unfaithful)으로 인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던 자들이 돌아온다. 돌아와서 예루살렘에 정착한다. 유다, 베냐민, 에브라임, 므낫세 자손 등이 돌아왔지만, 가장 먼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정착한 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던 제사장, 레위인, 느디님(성전 막일꾼) 사람들이었다(2). 성전은 그들이 떠나올 때 이미 훼파되었으니, 그들이 돌아온들 일할 곳이 없다. 그럼에도 성전에서 섬겼던 자들의 자손들이 가장 먼저 예루살렘에로 돌아와 정착한다. 그리고 성전을 짓고, 마침내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긴다.

지위가 있고 중요한 일을 했던 제사장뿐 아니라 단순한 일들을 반복했던 레위인들도 돌아오고, ...나아가 성전 막일꾼들의 자손 또한 먼 길을 마다 않고 돌아온다. 돌아온 그들은 매일 같이 성전 문을 여는 책임을 다하고, 매일 같이 성전 기구를 관리하고, 전병과 향기름을 만들고, 진설병을 준비하고, 골방에서 주야로 찬양을 위한 직분에 전념한다. 참으로 신실한 '능력있는 힘있는 자'들이 아닌가(13)? 역대상의 족보는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했기에 떠나갔으나, 마침내 다시 돌아온 이들의 성실한 매일의 이야기로 끝이 난다. 희망이다!!! 희망이 신실함을 낳고, 신실함이 희망을 현실로 만든다.

하나님 없는 세상에선 신실함이 어리석음이 되기도 한다. 희망이 성실함을 착취하는 풍선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 가까이서 매일을 살아가는 이들의 신실함은 부끄러움을 낳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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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눈물 (역대상 10장 1절~14절)

- 2012년 5월 7일 월요일 묵상

사울의 비참한 최후로 역대기의 역사가 시작된다(1). 사울을 지나치고 바로 다윗의 즉위로 나아갈 순 없었을까?

역대기 저자는 사울의 비참한 죽음을 기록하고 그가 '여호와께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그 이유를 설명한다(10:13).

유다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던 이유 또한 그들이 '여호와께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니(9:1), 그의 죽음은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다시 한번 주어지는 경고인 셈이다. 하지만 사울의 삶엔 양면성이 있다. 그도 처음부터 신실하지 않았던 왕은 아니었다.

그는 본래 겸손했고, 진실했다. 기름부음 받은 왕이 되었으나 이전과 다름 없이 소를 몰고 밭을 갈았다. (삼상11:5)

그런 그에게 어떤 길르앗 야베스 사람의 말이 들려왔다. 암몬 족속에게 핍박 받는 길르앗 야베스의 상황을 들은 사울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마침내 암몬 자손의 손에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원한다. 사울의 왕으로서의 첫 전투였고, 첫 승리였다. 그는 참으로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역대기 저자는 그러나 그런 사울이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함으로 죽음을 당했다고 말한다. 그렇다. 하나님께 신실했던 사울은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에 대한 '충성'의 마음이 나누어졌다. 마음이 나누어진 충성은 변심과 변절, 배신과 배반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배신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그 누구도 사울을 위해 울고자 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의 비참한 죽음에 눈물 흘리며, 7일을 금식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었다.

사울이 하나님께 신실했던 시절, 그리하여 사람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신실할 수 있었던 시절, 그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구원자였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겐 사울이 은인이었다. 사울의 비참한 죽음의 소식을 들었을 때, 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심을 따라 그들도 사울에게서 등을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사울에 대한 그들의 '신실함'을 지킨다. 길르앗 야베스의 용사들이 다 일어나(12) , 밤새도록 달려가(삼상 31:12), 목숨을 걸고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성벽에서 내려, 야베스로 돌아와 장사한다. 그리고 칠일을 금식한다.

눈물나는 밤이다. 신실함!!!! 한 사람의 신실함이 살려낸 목숨들만이 그를 향해 신실함을 나타낸다. 나는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이땅에 찾아와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 나의 왕께 신실한가!!!  아! 그 밤, 밤새도록 달려갔던 길르앗 야베스 용사들의 눈물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