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 한 배꼽에서 나온 자들 (고전 6:1-11)

2012-07-09 월요일

 교회 내부의 권리와 관련된 다툼으로 법원에 계류 중인 사건이 셀 수 없이 많은 오늘날의 한국 교회를 보며 바울은 뭐라 말할까? 음행이 교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인 바로 그 만큼, 세상 법정 앞에서 행해지는 성도간의 다툼 또한 교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울은 세상 법정에 대해 불의한 자들‘(1), ‘교회에서 아무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한 자들‘(4)이라 표현한다. 성도들 간에 구현되어 할 참된 의에 대한 판단을 그들에게서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 법정에서 권리 다툼을 하느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고 바울은 말한다(7). 권리 다툼이 있으면 무조건 손해를 보라는 말인가? 그런 말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 판단하라는 것이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이고, 심지어 천사 또한 심판할 것이다(2.3.). 그런데 교회가 형제 간에 일어난 일상의 문제 하나를 판단하고,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5) 그 사실이 바울에겐 답답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욱 답답한 것은 교회 성도들이 서로가 형제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다(5.6.8.). 형제라는 헬라말, 아델포스는 한 배꼽에서 나온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한 근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씻어지고 거룩해 지고 의롭게 된 자들이다(11).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한 가족의 일원이다. 예수의 자기 비움을 통해 형제가 된 자들 간의 권리 다툼이라니!

 

세상에서 제일 답답하고 씁쓸한 일 중 하나가, 형제간에 유산을 놓고 싸우는 일일 것이다. ‘형제투금兄弟投金이라는 고사가 있다. 형제가 길을 가다가 아우가 길에서 금 두 덩이를 주었다. 형에게 하나를 나누어 주었다. 나루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아우가 금덩이를 물에 던졌다. 형의 물음에 동생이 답했다. „내 평소에 형님과 우애롭게 지냈는데, 금덩이를 나누니, 형님에 대해 꺼리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차라리 물에 던져 잊는 것만 못하다 여겨 그리 하였습니다.“ 그 말에 형님 또한 금덩이를 물에 던졌다.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형제간의 우애가 재물보다 중요한 가치라는 것이 주된 내용일 것이다.

 

심판, 판단이란 가치에 대한 판단일 것이다. 무엇을 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세상 법정의 가치 판단을 거부하는 것이다. 내 권리를 찾는 것 보다, 손해를 보지 않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7).

 

하나님에게 있어 보다 중요한 가치, 그것은 우리 자신이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8:32) 자기 아들보다 우리를 더 가치 있다 여겨,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는 판단을 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가 형제가 되었다. 내가 내 형제들에 대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신적인' 마음이다.

-------------------------------

몸의 주인 (고전 6:12-20)

2012-07-10 화요일

바울 신학의 진수를 만난다. 숨을 고르고 잘 따라가야 한다.

바울은 이곳에서 왜 교회에서 음행이 있을 수 없고, 왜 교회에서 성도간의 권리 다툼이 있을 수 없는지 그 기초를 놓는다. 그것을 몸에 대한 자기의 이해를 통해 전개한다. 이 안에 그리스도와의 연합(17),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성도(15), 성령의 내주(19), 몸의 부활(14), 율법과 복음의 관계(12),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그 의미(12),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20) 등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든 내용의 핵심 자리엔, 우리가 주와 연합된 존재라는 바울의 이해가 놓여 있다(17).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 지체다(15).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17).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19).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한 몸, 한 영이라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2:20) 바울은 말 그대로 그렇게 알고, 믿고, 살았다.

예수가 내 안에 살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나를 값 주고 사셨기 때문이다(20).

그러니 나는 그의 소유고(19), 그는 내 몸(존재 전체)의 주님이다.

 

이 사실을 믿는 자는 자기 몸을 함부로 할 수 없다. 내가 이 몸으로 신전 창녀와 합하면, 그것은 곧 그리스도가 신전 창녀와 합해지는 것이다(15-16).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울은 이후 10장에서 우상 제물 먹는 문제 또한 같은 원리에서 풀어간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배하는 근본 원리다. 거기서 율법을 이루고야 마는 복음의 능력이 나오고, 거기서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나온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모든 것이 허락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허락된 어떤 것들의 이 되어서는 안 된다(12). 우리 몸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포르노스(음란을 행하는 자,13)는 자유자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 욕망의 주인이 아닌 종이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중독된 자도 자유자가 아니다. 복음은 자유를 준다. 그 자유는 모든 것이 다 허용되었다는 자유가 아니라,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살 수 있는 자유다.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살 수 있는 길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내 몸과 인생의 주인이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그와 연합하여 살고 있는지를 나타내주는 실질적인 표지가 하나 있다. “몸의 주인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이런 저런 몸의 욕망의 종으로 살고 있는가?“가 그것이다. 예수와 나는 하나다. 그가 내 몸 안에 산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몸으로 그렇게 하셨듯, 나 또한 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갈 것이다!(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