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의 이름으로 (고전 5:1-13)

2012년 7월 8일 주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선한 일들도 있지만,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악한 일들도 있다.

항구 도시 고린도, 풍요의 도시 고린도, 신들의 도시 고린도, 그 고린도의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고린도는 B.C.44년 시저(Gaius Iulius Caesar)의 명에 의해 재건되었고,

 B.C. 27년 아우구스투스(Gaius Iulius Caesar Octavianus)에 의해 아가야 지방의 주도(Hauprstadt)가 되어, 로마 총독(Prokonsul)의 거처가 되었다.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한 51년 초는, 고린도가 재건된지 100년 쯤 되던 때였다.

 

항구 도시가 다 그렇듯, 고린도 또한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였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 또한 그런 문화적 분위기에서 자유롭지만은 않았다.

"음행하는 자, 우상 숭배자, 간음하는 자, 탐색하는 자, 남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 안에서 씻음을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음 받았다.(6:9-11)

 

탐색, 남색, 음행, 간음....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살던 자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바울은 이후 계속되는 장에서, 저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던 것이, 예수 안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설명해야 하는 쉽지 않은 작업을

하게 된다.

 

앞서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었던 바울은 그런데 5장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전하며 다룬다.

교회 성도중 누군가가 자기 아버지의 부인, 그러니 계모와 함께 산다는 것이었다(1).

이런 일은 이방인 중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계모와의 결혼은 로마 법 또한 금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회의 성도 중 한 사람(남자)이 이런 일을 행했다.

더군다나 아마도 그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했다(2-3).

우리 성경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를 '함께 모여'에 걸리는 것으로 해석하며, Nestle-Aland 27판도 그것을 4절에 속한 것으로 보지만,

'주 예수의 이름으로'는 앞선 3절에 걸리는 것으로, 그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구문법 상으로 자연스럽다.

내용적으로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많은 번역본들이 이를 3절의 심판에 걸리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 행해졌던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의 이름으로 음행을 행했고, 교회는 예수의 이름으로 그런 일 행한자를 용납했다.

둘 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예수 안에서 있을 수 없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예수 믿는 믿음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다.

"예수 믿어 구원 받았다. 이미 지상의 육신에서 벗어나 해방되었다. 자유인이 되었다.

그러니 세상이 금하는 것들에서도 자유로워졌다. 무엇인든 다 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 자들 중, 한 사람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행했고, 그에 대해 교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육체적으로 더욱 엄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이후 6장에서 밝힌다.

그전에 먼저, 그렇게 음행한 자를 교회에서 내 쫓을 것을 명한다(2.5.13).

형제라 하는 자들 중, 음행, 탐욕, 우상숭배, 모욕, 술취함, 속여 빼앗는 자가 있거든 함께 먹지도 말라고 한다(11).

공동체에서 내 쫓으라고 한다(13).

그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야, 그것은 하나님 만이 심판할 일이나,

그 사람이 스스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런 일을 한다면, 교회는 그런 자를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부풀릴 것이기 때문이다(6).

그러한 것 하나가 허용된다면, 다른 일도 허용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이, 세상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물론 '도덕'을 지키는 것과는 다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도덕이, '도'와 '덕' 곧, 사람의 마땅한 '길'과 사람의 '인품, 곧 애써 행하려 하지 않아도 절로 행해지는 인품'라고 한다면

도덕이, 예수 믿는 자의 마땅한 '길'과 예수 믿는 자의 '성품'라고 한다면

그걸 개에게나 줘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악덕과 악행들뿐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악덕과 악행에 대한 정당화 또한 용납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어떤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진 악행이 다만 십자군 전쟁이나 면죄부 판매 같은 욕망의 정당화만은 아닐 것이다.

유월절 양으로서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신(7) 주 예수의 이름에 합당한 삶. 그 삶이'우리'의 삶이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