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속이지 말라 (3:18-4:5)

2012년 7월 6일 금요일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18) - 이 무슨 말인가? 왜 자기가 자기를 속인단 말인가? 왜 스스로에 대해 정직할 수 없단 말인가?

모든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이 때 사실이냐 사실이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 마음은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납득시킬 수 있는 몇가지 익숙한 설명의 방식들을 알고 있다.

 

(1)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책임을 다른데로 돌리는 것이다. 내 책임이 아니다, 그건 내가 문제가 아니라 잘못 알아들은 그 사람 책임이다.

내가 자기 파괴적인 것은 나를 그렇게 만든 누구 누구 때문이다. 지도자들이 저러니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2) 그건 단순한 실수였다. 한 두 번에 불과한 일이다. 오늘만 그럴 뿐 내일부터는 아니다. 다만 방법이 잘못 되었을 뿐이다. 다시 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

(3) 가치 부여를 통한 위로다. 그런 일은 사실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참여 자체가 중요하다. 많이 가지고 있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세상엔 능력보다 중요한 가치들이 있다. - 여기서 내가 그런 가치를 자기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에게 그런 가치가 없다는 확인만으로 사람은 충분히 만족스럽다.

(4) 기억의 조작이다. - 내게 불리한 일, 내가 잘못한 일들을 걸러 내어, 망각 속에 묻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일은 사람에게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본인 자신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5) 성공의 원인은 내게 있다. - 누가 잘 되었다면 그건 내가 좋은 조언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누군가가 앞서 나가는 것은 지극히 운이 좋기 때문이거나 아부한 때문이다. 내가 앞서 나간다면 그건 내 노력과 능력 덕분이다.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하는 사람, 자기 방어 기제 속에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18).

이러한 사람의 자기 중심성을 넘어서는 길은 없는가? 바울에게서 두가지 길을 볼 수 있다.

 

(1)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다(23).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닌 그리스도다.

나는 나 자신 앞에서 정당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앞에서 의로워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고, 청지기다(4:1). 나 자신도 다른 사람의 판단도 중요하지 않다(4:3-4)).

누구도 나의 마음을 알아 줄 이가 없다해도 하나님은 각 사람의 마음의 뜻을 아시고, 칭찬해 주실 것이다(4:5).

나는 그분에게 충성할 뿐이다(4:2).

 

(2) 나는 만물의 주인이다(21), 나는 나 하나의 인생만을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라, 만물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다(22).

그러니 내가 정당화해야할 대상은 나 자신만이 아닌, 이웃과 만물, 우주와 역사 그 전부이다.

나는 그 모든 것의 왕으로서 참으로 왕노릇해야 한다(4:8.15).

 

이 두가지 길을 가는 자가 반드시 가져야할 마음의 자세가 하나 있다.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지 않는 것이다(18a). 스스로 해답을 갖고 있다 생각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어리석다 생각하는 것이다(18b). 그리고 모든 것에 '예스'가 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길을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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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희 그리고 우리 (고전 4:6-21) 

2012년 7월 7일 토요일

너무나 엄청난 말들이 짧은 본문 안에 넘쳐난다.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자가 되십시오"(16)

"일만 스승이 있지만, 아비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을 낳았습니다."(15), "내가 여러분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습니다."(19)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 중 받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위해 이 일에 본을 보였습니다."(6-7)

 

바울의 '나'는 항상 - '여러분'과 함께 다닌다. 바울의 '나'는 항상 누군가를 '위하는 사람'으로 서 있지, 결코 홀로 있지 않았다.

'나'를 '나' 속에서 찾고자 한다면, 자기 안에서 '자랑할 뭔가'를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를 '너희' 속에서 찾는 자는 '너희' 안에서 자랑할 무언가를 찾게 될 것이다.

 

그런 바울의 빛나고 빛나는 문장 속에서 그러니 바울은 '나'가 아닌 '우리'로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습니다"(11)

바울은 지금 홀로 있지 않다. '나는 지금까지 주리고 목마르며... 정처가 없습니다'가 아닌 '우리는... 정처가 없습니다'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

"우리는 수고하고, 우리는 손으로 일을 하고, 우리는 모욕을 당하면 축복하고, 우리가 박해을 받으면 참고,

우리가 비방을 받으면 오히려 그 사람을 위로해 주고, 우리는 다른 이들의 삶을 위해 버려지는 존재같이 되었습니다"(12-13)

 

바울이 여기서 '우리'가 아닌 '나'라는 말을 넣어야만 하는 상황을 지나야 했다면, 그는 과연 말뿐이 아닌 실제로 그렇게 행하는 능력있는 자로

살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바울 곁에는 사랑하는 디모데가 있고, 각 교회의 형제들이 있다.

그러한 '우리'가 '너희'를 위해 '나'를 내어놓는 삶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한 삶을 살 때, '나'는 '우리'로서 살게 될 것이다.